동현은 서한 애제(哀帝)때의 총신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동현은 어사 동공(董恭)의 아들로서 태자의 사인(舍人)이었다. 그는 애제가 즉위한 뒤 낭관으로 승진했는데 애제는 상주문을 올리는 동현의 모습이 단아하고 준수하다고 느꼈다. 그러고는 그를 가까이에 있게 하였다. 황제가 그를 하도 어여삐여기는 바람에 그는 집에 가지도 못하는 날이많았다. 그런데 동현에게는 처도 버젓이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아예동현의 처를 궁으로 옳겨 살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동현의 누이도 비(妃)로 들여 황후 다음가는 높은 지위를 주었다.
그의 벼슬은 1천호, 2천호로 올라가다가 마침내 대사마까지 승진하였다. 22살의 나이에 벌써3공의 지위에 오른것이 었다. 모든대신들도 동현을 통해야만 황제에게 상주할수 있었다.
'단수(斷袖)'의 동성애
동현은 '단수'라는 고사로도 유명하다.
황제는 동현의 준수한 용모를 사랑하였고 두사람은 일종의 동성애관계였다. 두사람은 항상 같이자고 같이 붙어 있었다. 어느날 두사람이 낮잠을 자는데, 애제가 동현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한참 만에 애제가 먼저 잠에서 깨어 일어나려는데, 옆의 동현이 아직 곤히 자는 모습을 보자 그가베고 있는 자신의 소매(袖)를 찰라냈다. 그만큼 동현을 아낀것이다. 이후 '단수'라는 말은 동성애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동현은 이러한 애제의 총애속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일약국가 최고의 거부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애제가 죽은 뒤 왕망의 탄핵을 받고 모든직위에서 파면되었으며, 그날로 동현은 자결하였다.
황제의 수염에 뛰어오른 귀뚜라미
1267년, 몽골군이 상양을 포위했다. 바야흐로 변방이 백척간두에 달려 있다는 문서가 계속 도달했지만 가사도(賈似道)는 자기의 놀이와 향략만 우선시 했다. 그는 올라오는 모든 문서를 가로채고 일체 조정에 올라지 않았다.
그는 귀뚜라미 싸움을 너무 좋아하여 어전회의 때도 귀뚜라미를 품에 품고 다녓다. 이때문에 어전회의 중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고 소매에서 귀뚜라미가 튀어나오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때는 귀뚜라미가 황제의 수염에 뛰어오르기도 하였다.
도종(度宗)이 죽고 몽골은 악주를 점령하였다. 온 조정이 가사도에게 출정 압박을 가하자 가사도는 할수 없이 출정하였다. 그는 몽골의 승상 백안에게 선물을 바치면서 땅을 떼어주고 배상금을 바치겠다고간청했으나 백안은 끝내 거부하였다. 그는 저항할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고 자신이 지휘하는 13만 대군을 버리고 몇몇 부하들과 함께 작은 배로 도망쳤다. 결국 송나라 군사들은 지금의 안휘성 정가주에서 대패하였고, 사상자와 도망친 병사의 수는 부지기수였다. 몽골군은 순식간에 송나라의 수도 임안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조정은 가사도를 파면시키라는 소리로 가득찼다. 조정 실권을 쥔 사태화후도 별수 없이 가사도를 파면하였다. 이에 조정 내외에서 다시 가사도를 처형시키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황후는 가사도를 멀리 광동 지방으로 융배를 보냈다.
이때 일찍이 가사도로 인해 가족이 화를 입었던 정호신이라는 현위가 가족의 복수를 위하여 일부러 자신이 가사도를 수행해 유배지에 가겠노라고 자원하였다.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정호신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가사도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강박했지만 가사도는 구차하게라도 살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계속 정호신이 압박을 가하자 가사도는 약을 마시고 죽고자 하였다. 그러나 죽지는 않고 구토만 했을 뿐이었다. 마침내 정호신은 그를 변소에 데려가 죽였다.
가사도는 귀뛰라미에 관한한 최고의 전문가였다. 그는 세계 최초로 귀뛰라미에 대한 전문서적인 「촉직경(促織經)」이라는 서적을 펴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가충(賈蟲)', 죽'가씨벌레'라 불렀다.
'중국 고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앙 변법 (商鞅變法) (0) | 2020.05.06 |
---|---|
종이의 발명자 채륜(蔡倫) (0) | 2020.05.04 |
티베트의 영웅 송첸감포[松贊干布] (0) | 2020.04.26 |
몽골 통일 (0) | 2019.12.23 |
관도대전 (官渡大戰) (0) | 2019.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