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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

초(楚)나라 춘신군(春信君) 초나라 대신 춘신군(春信君)의 이름은 헐(歇)이며 성은 황(黃)씨이다. 사공자 중에 춘신군만 왕족 출신이 아니고 나머지 세 사람은 왕족 출신이었다. 춘신군은 초나라 회왕의 아들인 경양왕(頃襄王) 시절에 주로 활동하였다. 당시 초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제압당한 상태에 있었다. 초나라 충신 굴원이 자결한 그해에 초 경양왕이 동쪽에 있던 군사들을 규합(糾合)한 후 진나라를 공격하여 열다섯 개의 읍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이미 국운이 많이 기울어진 상태이라 진나라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은 없었다. 결국 경양왕은 태자 웅원(熊元)을 진나라에 볼모로 보내고 진나라와 화친을 하였다. 그때 볼모로 가는 태자를 수행한 사람이 춘신군이었다. 태자가 볼모로 진나라에 가 있던 중 경양왕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소식을 들은 춘신군은 .. 더보기
추연[ 鄒衍 ] 중국 전국시대의 제나라 사람이며 제자백가중 음양가(陰陽家)"음양가는 세상 만물과 현상을 음(陰)과 양(陽)으로 구분하고 또한 음양의 변화로 설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다."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추연(騶衍)이라고도 한다. 맹자보다 약간 늦게 등장하여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제창하였다. 세상의 사물과 현상은 음양(陰陽)과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즉 오행의 작용에의해 발생하고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었다. 이에 의하여 역사의 추이(推移)나 미래에 대한 예견(豫見)을 하였다. 이것은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과 더불어 중국의 전통적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평소 사람들과 천문(天文)에 관하여 함께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여 담천연(談天衍)이라는 별명으로 많이 불렸다. 당시 추연은 연(燕)나라, 위.. 더보기
손빈(孫臏) 손빈(孫賓) 춘추시대의 걸출한 군사 전문가로 훗날 '병성' 또는 '무성'으로 추앙받은 손무의 5대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귀곡자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방연(龐涓)에 의해 배신을 당하고 무릎 아래가 잘리는 빈형(臏刑)에 처해 앉은뱅이가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손빈(孫賓)을 손빈(孫臏)이라고 불렀다. ≪청년 시절에는 방연(龐涓)과 함께 병법을 배웠는데, 학업 성적이 늘 방연을 앞질러 그의 시기와 질투 대상이 되었다. 학업을 마친 뒤 방연은 위(魏)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혜왕(惠王)에 의해 장수에 임명되었다. 당시 제나라와 위나라는 중원의 패권을 놓고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사악한 방연은 손빈의 선조 손무가 남긴 병서를 손에 넣기 위해 손빈을 죽이지 않고 무릎 아래를 잘라내는 형벌인 빈형(臏刑)을 가.. 더보기
손무[ 孫武 ] 춘추시대 제(齊)나라 낙안(樂安)사람으로 자는 장경(長卿)이다. 그의 선조 진완(陳完)은 원래 진(陳)나라 공자로 내란 통에 제나라로 도망와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다. 손무의 할아버지 전서(田書)는 거(莒)를 공격하는 전쟁에서 공을 세워 제 경공이 낙안을 근거지로 주고 동시에 '손(孫)'이란 성까지 하사했다. 손무 집안의 성씨(姓氏)는 진(陳), 전(田)을 거쳐 그때부터 손(孫)이 되었다. 사람들은 손무를 병성(兵聖) 혹은 무성(武聖)으로 추앙하였으며 또한 그를 높이 불러 손자(孫子)라고 하였다. 기원전 532년, 제나라에 전(田)·포(鮑)·난(欒)·고(高) '4성의 반란'이 터졌고, 손무의 집안도 이 정치투쟁에 휘말렸다. 이때 손무의 집안은 오(吳)나라로 망명을 가야 하였다. 그후 손무는 대부분의 젊.. 더보기
한무제 기원전 141년 경제(景帝)가 죽고 그의열한 번째 아들 철(徹)이 제위에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16세였으며 이 임금이 바로 전한 왕조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무제(武帝)이다. 그는 한왕조 창업 이래 쌓아 올린 문화적. 경제적 여력을 바탕으로 역대 이래 취해 오던 무위(無爲)의 노장 사상에서 유위(有爲)의 정치 체제로 전환했다. 또 수십 년 동안 북쪽의 취해 오던 화친전책을 굴욕적인 것이라 판단하여 공격 위주의 강격책으로 전환했다. 무제는 제후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조정의 대권을 강화했으며 경제면에서는 화폐 제도를 통일하여 정부가 화폐를 주조하고 소금. 철. 술 등의 전매 제도를 채택했다. 사상면에서는 제자백가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고 유가인 동중서(董重舒)의 사상을 받아들여 중앙 집권제의 강화와 국가.. 더보기
노자 노자 중국 고대의 사상가이며 도가(道家)의 시조이다. 노자는 초(楚)나라 사람이며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그리고 자(字)는 백양(伯陽),시는 담(聃)이다. 노자의 고향은 고현(苦縣)의 여향 곡인리로 지금의 하남성 녹읍이다. 그는 언제나 늙은 소를 타고 다니며 자신의 사상을 얘기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그의 귀가 길게 늘어져 있으며 귓바퀴가 없이 담(聃)이라고 불리었다. 노자는 한때 주나라 왕실의 도서 관리자로 일하다가 정치척인 이유로 노나라로 망명했다. 공자는 노자에게 예(禮)에 대해 물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자가 볼 때, 공자는 아직도 혈기가 왕성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노자의 나이는 공자보다 20세 정도 위였을 것으로 보이나 그의 출생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공자는 노자에게 도(道)에 관한 .. 더보기
관우(關羽)의 죽음 형주를 지키고 있던 촉한의 관우는 동쪽의 손권과 북쪽의 조조를 호시 탐탐 노리고 있었다. 촉의 형주 경영의 중심지는 강릉에 있었고,유비와 손권의 타협으로 나뉜 오나라 측의 형주 경영 중심지는 육구였다. 이때 육구에는 오나라 명장 여몽이 버티고 있었다. 관우는 동쪽의 육구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조조가 있는 북쪽 중원도 노리고 있었다. 조조 세력의 남방 전선 기지는 번성에 있었다. 번성은 조조의 장군 조인이 지키고 있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략하기 위해 강릉에서 북상했다. 그러나 강릉에 있는 군사를 전원 동원할수는 없었다. 그것은 손권의 명장 여몽이 육구에서 버티고 있어 강릉의 허점을 노릴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병력은 강릉에 남겨 놓고 북상했다. 번성만 함락하면 조조의 중원이 바로 눈앞.. 더보기
제갈공명( 諸葛孔明) 의 죽음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이자 군사가.그의 자는 공명(孔明)이고, 호는 와룡(臥龍)이다.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제갈공명은 오나라와 화친을 맺은 후 북벌군을 출동시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운남 지방에서 만족(蠻族)의 추장 맹획(孟獲)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공명은 남정(南征)길에 올랐다. 일곱 차례의 전투 끝에 맹획은 그들의 풍습에 따라한쪽 웃통을 벗어부친 채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이렇게 해서 운남 지방이 평정됐다. 운남 지방을 평정한 후 제갈공명은 행정 구역을 개편하고 정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