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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조광윤(趙匡胤)의 송나라 건국: 진교 병변(陳橋兵變)

 오대십국의 마지막 왕조 후주는 하북의 군벌인 곽위에 의해 951년에 건립되었다. 곽위가 몇 년 뒤 사망하자 그의 양자 시영이 뒤를 이어 세종으로 즉위했다. 세종은 큰 포부를 품고 과거 후당이 거란에게 할양한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한 통일 전쟁을 계획했다. 이에 그는 중앙의 금군을 재편하여 강화해 나갔고, 마침 북한이 거란과 연합하여 침공하자 친정을 감행했다. 세종은 고평에서 북한 군대를 만나 힘든 싸움을 벌였으나 조광윤의 선전으로 북한을 물리쳤다. 원래 조광윤은 후주 개국 공신으로 금군군과, 전장금군의 직위에 있었는데, 고평 전투 승리 후에는 세종의 더 큰 신임을 얻어 금군 사령관이 되었다.

 북한에게 승리를 거두고 자신감을 얻은 세종은 좀 더 적극적인 통일 전쟁을 펼쳤다. 세종은 955년에 후족의 사천을 빼앗은 데 이어, 같은해 겨울에는 남방의 강국 남당을 공격했다. 그리고 958년까지 세 차례의 걸쳐 남당을 공격하여 양쯔 강 하류 지역을 장악했다. 세종은 남당의 양주를 얻는 데 조광윤의 큰 공을 세운 것을 인정해 광국절도사와 금군 최고 사령관에 임명했다. 959년, 마침내 세종은 천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요나라 정벌을 감행했다. 세종은 인련의 전투에서 요나라를 격파해 연운 16주 중 2개 주를 회복하는 등의 성과를 보여 통일을 이루는 듯했다. 그러나 천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는지, 세종은 원정 중 병을 얻어 959년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이 갑작스럽게 병사하자 일단은 그의 아들 시종훈이 황위를 이어 공제가 되었다. 그러나 공제의 나이가 일곱 살에 불과한 것이 문제였다. 어린 황제가 즉위하고, 절도사들의 힘이 여전히 강력하자 후주의 민심과 정세는 금세 불안해졌다. 게다가 세종의 붕어로 후주의 정세가 어지러움을 틈타 요나라가 재침을 시도하니 군인들의 불만은 더 심해졌다. 이에 요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출정한 장수들이 금군 사령관 조광윤을 옹립 하기에 이르렀다.

 960년, 금군 사령관 조광윤은 어린 공제를 대신해 정무를 살피던 황태후의 명에 따라 요나라 방어에 나섰다. 조광윤의 군대는 수도 개봉에서 약 40리 떨어져 있던 진교역에 머물렀다. 개봉을 떠난 다음 날 조광윤은 술에 만취해 잠이 들었다가 동생 조광의가 깨워 마당으로 끌려 나갔다. 그곳에서 부하들이 집합하여 칼을 받쳐 든 채 그에게 황제가 되어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가 자고 있던 사이, 동생 조광의와 심복 조보가 조광윤을 황제로 추대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조광윤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어느새 황포를 입고 있었고, 장병들이 함성을 지르자 그제야 공제, 황족, 중신들을 해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낸 후 회군을 결정했다. 개봉으로 돌아와 황궁을 점령한 조광윤은 공제에게 황위를 선양 받아 황제가 되었다. 그는 국호를 송이라 칭하고 개봉을 수도로 삼았다. 이것을 진교병변이라 하며, 이로써 중국 역사는 혼란의 오대십국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다시 통일 왕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진교병변 같은 군사 정변은 오대십국 시대의 왕권 교체 때마다 나타났다. 그러나 진교병변이 과거의 정변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피를 흘리지 않고 새 왕조를 열었다는 것이다. 물론 조광윤을 반대했던 한통이 그의 부하들에게 피살되었지만, 그는 공제와 후주의 황족들인 시씨를 남송 멸망 때까지 보호했다. 특히 공제가 968년,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병사했을 때는 황제의 예로 장례를 지내 주었다. 또한 조광윤은 후주 세종의 아들을 휘하의 반미에게 키우게 하였고, 후에 그 아이는 송나라의 관리가 되었다.

 한편 진교병변의 또 다른 의의는 조광윤이 5대의 할거 정변을 답습하지않고 황권 중심의 통일 왕조 송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5대의 흥망을 몸소 체험한 조광윤은 5대 왕조처럼 단명하지 않기 위해 중앙을 강화하고, 당나라 말기부터 존재했던 번진 세력들을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다. 조광윤이 번진 세력들의 병권을 빼앗아 장악한 사건을 역사는 배주석병권이라 한다.

 961년 가을, 조광윤은 석수신, 고회덕, 왕심기 등 개국 공신들을 궁중 연회에 초대했다. 그는 금위군 장수 석수신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만약 경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짐은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경들이 모르는 것이 있소이다. 황제 노릇이 얼마나 힘든지 말이오. 황제가 된 후 편안한 잠을 잘 수 없으니 차라리 절도사 시절이 더 행복한 것 같소."4

 조광윤의 이 같은 말에 석수신 등 공신들은 이상히 여겨 황급히 연유를 물었다.

 "아니, 그 이유를 경들은 진정 모른단 말이오? 세상에 황제라는 자리에 앉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이 말에 뼈가 있음을 알아챈 석수신 등 공신들은 모두 바닥에 무릎을 끓고 말했다.

 "저희들이 어찌 황제께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절대 두 마음을 먹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조광윤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설마 그대들을 못 믿겠는가? 그대들이 황위를 탐내지 않는다 해도 그대들의 부하 중 부귀를 얻고자 그대들을 황제로 만들려는 자가 있을 수 있지 않겠소? 만일 그들이 그대들에게 황포를 걸쳐 준다면 그대들이 하기 싫다고 해도 거절하기 힘들 것이 아닌가?"

 이네 공신들이 어찌해야 할지를 묻자 조광윤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인생이란 백마가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덧없이 지나는 것과 같으니,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소? 누구나 부귀를 누리며 잘살고 싶소, 자손들이 태평하길 바라지않소? 그러니 경들은 병권과 자리를 내놓고 아예 지방으로 내려가 좋은 논밭을 사고 집을 지어 여생을 편히 보내는 게 좋지 않겠소? 그리고 내 자식과 경들의 자식을 혼인시킨다면 군신 관계가 더욱 돈독해져 서로가 편안할 거라 생각하오."

 조광윤의 말을 숨죽여 듣고 있던 공신들은 이튼날 모두 나이가 들었으니 이만 사직하겠다고 청했고, 조광윤은 이를 말없이 받아들였다.

 배주석병권의 일화처럼 평화적으로 번진 세력의 병권을 장악한 조광윤은 번진의 재정권, 행정권도 회수했다. 이후 그는 군대와 각 지방의 실권자를 모두 문관으로 임명하고, 이들을 중앙에서 파견했다. 또한 각급 관리들의 근무에 성적을 매겨 3년의 임기를 마치면 교체하는 방식을 채택해 지방 반란의 가능성을 베제했다. 이것은 모두 황제 권한을 강화 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광윤은 당나라의 제도를 따르는 한편,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여 황제권을 더욱 강화했다. 행정면에서도 사실상 재상을 없애고 5~6명으로 구성된 재상부를 구성해 임무를 담당하게 했으며, 업무의 최종 결정은 재상부의 합의와 황제의 결재로 이루어지게 했다. 한편 군사를 담당하는 추밀원을 두어 황제에 직결시켰다.

 황제 중심의 직권 체제를 구축한 조광윤은 통일 전쟁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북방 요나라와 전투를 과감히 포기하고 우선 남정에 나섰다. 그는 963년에 호북성의 형남을  합병하여 양쯔 강 중류를 얻었으며, 965년에 사천성의 후촉을 병합했고, 971년에는 광주를 지배한 남한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975년에는 화남에서 최대 세력을 자랑하는 남당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송나라가 통일 왕조의 모습을 갖추어 나갈 즈음인 976년, 조광윤이 병사했다. 송나라의 완전한 중국 통일은 조광윤의 동생 조광의가 978년 오월, 979년 북한을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이루어졌으며, 송나라의 역사는 319년 동안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