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의 난이 완전히 진압된 것은 763년 2월이었다. 이후 당 왕조는 존속되긴 했으나 국정 운영에 어려움이 더욱 심해졌다. 당 왕조는 안사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번진을 각 지역으로 확대해 절도사로 하여금 병권을 지휘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번진은 내지까지 설치되어 40개 정도로 확대했으며, 중요도에 따라 절도사, 방어사, 단련사가 파견되었다.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는 군사 지휘권의 장악과 더불어 국가에서 위임받은 행정권가지 행사할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점차 번진이 당 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경향을 보이자 그들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고 순응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최우선으로 황제와 유대가 돈독하고 강한 중앙 정부군을 증강하고자 했다. 이에 많은 재정이 필요해진 당 왕조는 가장 손쉽게 재정수입을 늘릴수 있는 방법인 세금 징수를 감행했다. 가혹한 세금 징수는 곧 민생의 파탄으로 이어졌다. 이와 더불어 당 왕조는 전횡을 일삼는 환관뿐만 아니라 국가 주도권을 가지고 정치 투쟁을 벌이는 전통 문벌 귀족과 신흥 관료의 대립으로 더욱 혼란에 빠졌다.
통치 세력의 부패와 국정 혼란은 결국 크고 작은 반란을 초래했다. 855년 절동 지역에서 일어난 병사들의 반란을 시작으로, 858년에는 영남, 호남, 강서, 선주 등지에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859년에는 구보라는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초기에는 100여 명 정도였던 반란군에 유랑농민과 도둑들이 합세해 그 규모가 상당했다. 이후에도 반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그중에서도 황소의 난은 당 왕조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평민 출신의 소금 상인이었던 황소는 소금 전매로 막대한 부를 형성한 후 북방 출신의 병사들을 회유해 난을 일으켰다.
874년, 소금 밀매업자 왕선지가 하남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천보평균대장군이라고 자칭하고, 당시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빚어낸 당 왕조의 죄를 폭로, 규탄하는 격문을 띄운 후 봉기에 참여할것을 호소했다. 그러자 수천 명의 농민들이 봉기군에 가담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황소도 산동에서 호응했다. 왕선지와 황소의 지휘 아래 봉기군이 점점 강해지자 당 왕조는 군사를 소집하고 번진 절도사에게 봉기국 진압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절도사들은 당 왕조의 명령에도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지 않았다. 더구나 봉기군이 따로 거점을 마련하지 않은 채 약한 생대를 골라 공격하는 작전을 펼쳐 산동, 하남, 호복 지역까지 세력을 떨치자 당 왕조는 회유책을 썼다.
먼저 당 왕조는 왕선지에게 투항을 조건으로 좌신책군압아 겸 감찰어사의 관직을 제안했다. 왕선지는 당 왕조으 제안에 동요했다. 하지만 황소는 당 왕조가 왕선지에게 낮은 관직을 주어 봉기군에 내분을 일으키려는 것임을 알아챘다. 이후 왕선지와 황소는 군사를 나누어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왕선지는 서쪽으로, 황소는 동쪽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878년, 왕선지가 호북으로 출격했다가 황매에서 대패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왕선지의 10만 군까지 흡수한 황소의 목표는 당나라 제2의 도시 낙양이었다. 그러나 낙양은 결코 만만한 도시가 아니었다. 당 왕조는 낙양 부근에 수십만 대군을 집결시켜 봉기군을 토벌하려 했따. 이에 황소는 낙양을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광주로 진군하여 879년에는 마침내 광주 함락에 성공했다. 광주가 함락되자 봉기군의 세력은 더욱 확장되었으며, 880년에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낙양을 점령한 다음 동관을 공겼했다. 황소의 동관 공격 소식에 당나라 희종과 조정 대신들은 대경실색하여 사천으로 피란을 떠났다. 미처 떠나지 못한 대신들이 황소에게 투항함으로써 황소는 마침내 장안에 입성했다. 그리고 희종을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대제라 하고 연호를 금통으로 정했다.
하지만 사천으로 피란 간 희종을 쫓지 않는 결정적인 과오도 저질렀다. 황소는 장안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희종을 추적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또한 당 왕조의 금군과 번진 세력을 무장 해제시키고 자신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했지만, 여기에도 무관심했다. 게다가 봉기군이 점령한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는 실수를 저질러 후에 당 왕조가 반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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