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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아골타의 등장

 송의 정화 4년 2월의 일이다. 요나라 천조제는 그들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혼동강에 와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요나라 각지의 기라성 같은 수장들이 문안과 하례를 드리기 위해 멀리서 달려와 천조제를 모셨다. 때마침 여진족의 축제일 이어서 천조제는 잔치를 베풀고 각 지방 수장들에게 차례대로 일어나 춤을 추도록 명했다.

 수장들은 순서에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씩 일어나 춤을 추었으나 나이 40세 정도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한 수장은 자기의 차례가 돌아오자 "나는 춤을 못 춥니다." 하고 거부했다. 천조제는 재삼 명령했으나 이 수장은 완강히 거부하여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조제는 격노하여 이 수장을 죽이려 했다.

 이 수장이 바로 후에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이다. 아공타는 여진족 완안부의 수령으로 강직함과 용감성으로 여진족의 부족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여진족은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서 선진 시대에는 `숙신`, 수. 당 시대에는 `말갈`이라 불렸고, 오대에 들어서면서 `여진`이라 불리게 되어 요나라에 복속됐다.

 요나라는 여진족의 세력이 강대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진족을 `생여직과` `숙여직`으로 나누어 분할 지배했다. `숙여직`은 요나라 영내에 이주시켜 요나라 국적을 부여했으나 `생여직`에게는 원주지로부터 이동시키지 않고 그대로 요나라 국적만을 부여했다.

 아골타는 생여직의 한 수장이었다. 그 후 여진족은 요. 송과의 교역을 활발히 전개하여 송의 후기에는 철기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크게 발전했다. 아골타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과도기에 나타난 여진족의 걸출한 수장이었다.

 천조제는 자기의 명령을 어긴 아골타를 즉석에서 죽이려 했으나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이것은 아골타와의 인정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아골타를 죽임으로써 여진족의 요에 대한 반항을 부채질할까 두려워서였다. 사실 이런 구실, 저런 구실을 내세워 요가 억압하자 여진족의 분노는 일촉즉발의 찰나에 다가와 있었다.

 여진족은 요에 복속되면서 매년 인삼, 금, 모피, 말, 진주, `해동청`이라 불리는 매 등을 요의 왕실에 바쳐 왔다. 그러나 탐욕이 많은 요의 왕실은 해마다 연공을 증가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대신을 보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강요했다. 요의 대신들은 여진족의 땅에 들어서면 잠자리에 부녀자를 바치게 하고 `교역` 이라는 명목으로 제멋대로 약탈을 자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폭행 앞에 아골타는 여진족의 각 부족과 은밀히 꾀하여 무기를 모으고 진지를 구축하여 요와의 싸움을 준비했다.

 여진족의 이 같은 움직임을 눈치챈 요는 즉시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를 실시했으나 이섯은 도리어 여진족의 불만에 불을 붙인 결과를 가져왔다.

 1114년 9월 아골타는 여진족의 각 부족을 규합하여 요가 저지른 죄상를 폭로하고 요를 멸망시키기 위해 힘을 합쳐 싸울 것을 호소했다.

 아골타의 말이 끝나자 각 부족의 수장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서서맹세의 말을 했다. 그리고 요의 대군이 집결하기 전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그 맹세의 현장에서 그대로 출진했다. 분노의 치민 여진족은 일거에 요의 동북 관문인 영강주를 함략했다.

 이때 여진족의 병력은 겨우 2,5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개월 후에는 1만 명도 채 못 되는 병력으로 출하점에 있던 요의 10만 대군을 격파했다. 이듬해 12월 요의 천조제는 친히 70만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했으나 아공타는 겨우 2만 명의 여진 부대 선두에 서서 이들을 맞아 싸워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요의 전사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100리에 걸치는 싸움터에는 시체가 줄을 이었다. 이 싸움에서의 참패로 간이 오그라진 천조제는 하룻밤에 500리를 달리는 말을 타고 도망쳐 돌아왔다는 전설까지 있다. 이렇게 해서 요양부에서 황룔부에 이르는 요동 땅은 모두 아골타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요나라에 멸망당했던 발해국의 잔당도 속속 아골타에게 복속됐다

 파죽지세로 요군을 무찌른 아골타는 1115년 1월 1일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대금이라 일컬으니 이 사람이 역사상 금의 태조이다. 그는 요를 멸망시킬 것을 맹세한지 불과 1백여 일만에 일개 부족의 수령에서 황제가 되어 요하 이동의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나라 이름을 금이라고 정한 데 대하여 이런 전설이 있다. 아골타의 무리들이 나라 이름에 대하여 의논할 때 아골타는 이렇게 제안했다.

 "요나라는 빈철을 상징하고 있다. 확실히 빈철은 튼튼하기는 하지만 녹스는 일이 있다. 영구히 변하지 않고 빛을 내는 것은 금뿐이다. 게다가 우리들 여진족은 안출호 강가에 살고 있다. 어떻소, 금이라는 나라 이름이 우리 여진족에게는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해서 만장일치로 금나라로 정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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