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속담에 `매미를 잡아먹는 사마귀 뒤에서 참새가 사마귀를 노려보고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 같은 속담은 송나라를 침범하는 금나라의 상황을 단적으로 비유하는 것이라 하겠다.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범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있을 무렵, 북방에서 새로 일어난 몽골족이 금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몽골족의 귀족 테무친은 1204년 나이만부를 격파하여 몽골 초원의 유목 민족인 전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에 오논 하반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칭기즈칸으로 추대되어 즉위했다. `칭기즈` 란 `절대적인 힘` 이란 뜻이고, `칸`은 `구주`를 뜻한다.
몽골족은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서 당나라 시대에는 몽올이라 일컬어지는 질위족의 한 부족이었다. 진. 한 이전에는 동호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동호와 흉노는 원래 몽골 초원의 우방 이었으나 뒤에는 서로 옥신각신 싸우는 사이가 되어 흉노에게 쫓겨났고, 동호의 일부가 대흥안령 산맥 깊숙이 도망쳐 들어갔다고 한다. 몽골족은 이 동호 계통의한 부족으로 영주도 없고 상하의 구별도 없는 씨족제 원시 사회의 생활을 답습하고 있었다. 몽골에 국가가 탄생하고 문자. 법률이 제정된 것은 테무친이 칭기즈칸으로 추대된 후이다. 몽골족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노예제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칭기즈칸이 군주의 자리에 오른 지 3년 후에 금나라 황제 장종이 죽고 그 이듬해에 새 황제 위소왕 영제의 사자가 조서를 가지고 칭기즈칸에서 왔다. 위소왕의 사자는 지금까지의 관례에 따라 배례를 올리고 조서를 받들도록 하라고 명했다.
원래 몽골족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몽골의 각 부족이 금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 몽골이 통일되어 그 세력이 강대해지면 반항할 것을 두려워한 금나라에서는 몽골족에 대하여 분할 지배 정책을 취하여 몽골족의 각 부족끼리 싸움을 하게 했다. 칭기즈칸의 아버지도 이러한 싸움 때문에 같은 몽골족에게 체포되어 금나라로 압송되어 책형을 당했다.
금나라에서는 또 3년마다 몽골에 출병하여 각 지방을 순회하며 장정들을 죽여 없앴다. 게다가 몽골족에 대한 금나라의 경제적 약탈도 가혹했다. 이런 일로 인하여 금나라에 대한 몽골족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럴 때 금나라의 새 황제가 몽골의 군주 칭기즈칸에게 무릎을 꿇고 조서를 받으라 하니 칭기즈칸이 전례에 따라 그렇게 호락호락 굴복할 턱이 없었다. 칭기즈칸은 그 사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금나라의 새 황제라니, 그게 도대체 누구요?"
금나라의 사자가 대답했다.
"위소왕 입니다."
위소왕 완안 영제는 겁이 많고 우둔한 제왕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칭기즈칸은 금나라 황제가 있는 남쪽을 향하여 침을 뱉으며 강경한 언조로 말했다.
"뭐라고? 나는 중원의 황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귀인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위소왕이 황제라니 정망 놀랄 일이다. 그따위 어리석은 자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다하라니 정말 가소로운 일이로다."
칭기즈칸은 뱉듯이 말하고 곧바로 말에 채찍을 가하여 쏜갈같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금나라 사자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사자가 금나라에 돌아와 자초지종을 낱낱이 보고하자 금나라 황제는 더욱 성을 내어 테무친이 입조하는 날을 기다렸다가 그때 죽여 없애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테무친이 이 같은 사실을 모를 턱이 없었다. 그는 금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말았다.
해가 바뀌어 1211년이 되자 칭기즈칸은 대군을 거느리고 켈룰렌 강까지 남하하여 조그마한 언덕 위에 올라 금나라의 정벌을 하늘을 우러러 맹세했다.
"영원 불멸하는 하느님이시어, 금나라 황제는 우리 선조들의 목숨을 빼앗고 우리 민족을 욕되게 했습니다. 만약 하늘이 복수를 허락하신다면 우리들에게 힘을 주소서."
칭기즈칸의 이 같은 맹세의 말은 몽골족 장병들을 크게 분기시켰다. 이렇게 해서 금나라 정벌의 막이 오르게 됐다.
몽골군은 도처에서 금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매년 금나라의 주. 금을 공략, 함락했다.
1213년 금나라 황제 위소왕 영제는 재위 5년 동안 단 한 해도 몽골의 침략을 받지 않은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몽골에게 연전연패 함으로써 장병들로부터 인망을 잃어 우부원수 호사호에게 살해됐다. 풍왕 순이 그 뒤를 잇게 되니 이 이가 선종이다.
칭기즈칸은 군사를 하북, 하동, 산동의 세 갈래로 나누어 연남. 하북. 산동의 50여 주를 점령했다. 이듬해인 1214년 칭기즈칸은 산동에서 돌아와 연경 북쪽까지 육박하여 그곳에 주둔하자 제장들은 모두 연경을 공격하자고 요청햇다.
칭기즈칸은 금나라 선종에게 사자를 보냈다.
"산동. 하북의 땅이 모두 나에게 돌아왔다. 그대가 지키는 곳은 오직 연경 뿐이다. 하늘은 이미 그대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 나 또한 그대를 궁지에 몰아넣는다면 하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나는 군사를 돌릴 생각이다. 그대는 군사를 위로하고 우리 제장들의 노여움을 풀도록 하라."
이에 금나라 선종은 기국 공주와 동남 동녀 각각 500명, 말 3천 필, 비단 약간을 바치면서 강화를 요청했다. 칭기즈칸은 강화를 수락하고 포로로 잡았던 남녀 수십만 명을 죽이고 돌아왔다.
금나라 선종은 연경에서 자립할 힘이 없었다. 마침내 그해 5월 스도를 개봉으로 옮기고 승상 완안 복흥에게 태자 수충을 보좌하여 연경을 지키도록 명했다. 칭기즈칸은 금나라 선종이 수도를 옮긴 것은 자기를 의심했기 때문이라며 크게 노하고 대군을 출동시켜 연경을 포위했다. 연경을 지키던 태자 수충은 개봉으로 도망치고 그 후 1년 만에 연경은 함락됐다. 몽골군은 하동에서 황하를 건너 개봉에서 20리 떨어진 지점까지 점령하고 북쪽으로 돌아왔다.
중원에 갇힌 신세가 된 금나라로서는 남송과 연합하여 몽골군과 대항하는 것이 상책이었으나, 금나라 집권층은 남송을 집어삼켜 자기들의 발판을 튼튼히 하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남송을 거듭 공격했으나 남송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승산 없는 소모전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병력과 물자의 소모가 너무 많아 그들의 국력은 쇠퇴 일로를 걷게 됐다. 이러한 기회를 노리고 있던 몽골은 금나라에 대하여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1232년 몽골군은 금나라의 주력 부대와 대치하여 결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엇다. 이 전투에서 몽골군은 금나라 군사를 피피로하게 만드는 작전을 썼다. 금나라 군사가 공격해 오면 후퇴하고 또 공격을 멈추면 습격하여 휴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금나라 군사는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굶고 잠도 자지 못했다.
몽골군은 삼봉산에서 피로에 지친 금나라 군사를 포위했다. 때마침 폭설이 내리는 추운 날씨였지만 금군을 포위한 몽골군은 보라는 듯이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식사를 하면서 교대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폭설에 갇혀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금나라 군사에게도 도망칠 길을 열어 유인하는 한편 미리 그곳에 정예 부대를 배치했다. 몽골군의 유인 작전에 빠져든 금나라의 장군을 포함한 주력 부대는 이곳에서 여지없이 퀘멸됐다. 이 삼봉산에서의 패전은 금나라의 패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해에 몽골군은 다시 개봉을 포위했다. 마침 개봉에서는 전염병이 만연하여 50일 사이에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잇따라 죽었고, 식량의 공급도 중단되어 인육을 먹는 참상까지 발생했다. 몽골군의 입성을 앞두고 개봉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이듬해 개봉을 탈출한 금나라 애종은 우선 귀덕까지 도망쳤다가 다시 채주로 옮겨 갔다.
막다른 궁지에 몰린 금나라는 이때서야 남송과 연합하여 몽골과 싸울 생각을 했다. 그들은 급히 사신을 남송에 보내 이렇게 제의 했다.
"잔혹하기 그지없는 몽골은 이미 40여 개국을 집어삼키고 서하까지 멸망시켰소.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 서하가 멸망하면 그 위험은 금나라에 미치고, 금나라가 멸망하면 그다음은 송나라의 차례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금나라와 송나라가 연합하여 몽골과 대항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남송은 이미 몽골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치겠다는 밀약을 맺었다.
이듬해 11월 몽골과 송나라가 연합하여 채주를 공략했다. 송나라는 남쪽에서, 몽골은 북쪽에서 협공했으나 금군의 수비도 견고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2년 후 1234년에 이르자 채주성에는 식량의 공급이 중단되고 성벽도 여기저기 무너져 함락 일보 직전에 빠져들었다. 금나라 애종은 이제 끝장이라 생각하고 동면 원수 승린에게 제위를 물려주고자 승린을 불러 말했다.
"짐은 이처럼 몸이 뚱뚱하여 도저히 말을 타고 도망칠 수가 없다. 경은 몸도 날쌔고 유능한 장군이다. 만약 이곳에서 탈출하게 되거든 기필고 금나라의 재건에 힘써 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짐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지막 소원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승린은 제위 계승의 의식을 거행했으나 그때 채주의 남쪽 교외에는 이미 송나라의 깃발이 나부끼고 송나라 군사의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보고받은 금나라 애종은 자결로써 일생을 청산하고, 제위를 이은 승린도 모반을 일으킨 부하에게 살해됐다. 또한 재상 완안 중덕 등 장병 5백여 명도 여수에 몸을 던져 순사했다. 이 뒤를 이어 각지의 금나라 장병과 관리가 잇따라 몽골군에 투항함으로써 금나라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에도 공주에서는 아직 금나라의 1개 부대가 여전히 싸움을 계속했다. 금나라 장군 곽하마가 거느리는 부대였다.
1236년 10월 몽골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공주 공격에 나섰다. 이를 맞아 싸우는 곽하마의 군대는 성내에 있는 금. 은. 동. 철을 모아 포탄을 만들어 몽골군에게 포격을 가하며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러나 중과주적으로 그들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불리했다. 어쩔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곽하마는 성내에 있는 소를 잡아 장병들을 위한 위로연을 열고, 몽골군에게는 조그마한 물건 하나라도 넘겨줄 수 없다 하여 건물과 청고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최후에는 관청 주위에 섶을 수북히 쌓아 자결 장소를 만들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몽골군이 성안으로 쳐들어오자 도처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활도 다 되고 힘도 다 빠지자 금나라 군사들은 차례차례 불이 타오르는 섶 위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끝까지 항전하던 곽하마는 쌓아올린 섶 위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덧문짝을 방패로 세워 2~3백 개의 화살을 쏘았는데 그 화살 하나 하나가 보기 좋게 몽골병을 꿰뚫었다. 그렇지만 곽하마도 끝내는 힘이 다하여 훨훨 타오르는 불길 속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죽었다.
영웅의 거리 공주에서는 한 사람의 투항자도 없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곽하마의 충성과 용기를 추모하여 그곳에 사당을 세웠다. 금나라는 아홉 황제, 120년으로 그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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