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년, 후한의 제12대 황제 영제(靈帝 재위 156~189)가 죽은 뒤 실권을 장악한 외척 하진은 누이동생 하황후 소생인 소제를 황제를 즉위시켰다. 이어 그는 환관 척결에 나섰다. 그의 계획은 명문 사인 출신 원소(袁紹)와 병주목 동탁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환관들은 100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온갖 음모화 계략과 배신으로 황제를 쥐락려락하고 있었다. 결국 하진의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어 환관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원소는 하진의 죽음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사촌 동생 원술과 궁문을 치고 들어가 마침내 2천여 명의 환관들을 주살했으며, 동탁은 소제와 소제의 동생 유협(劉協)의 신병을 확보했다. 그러고 곧 동탁은 소제를 폐위시키고, 유협을 헌제(獻帝, 재위 189~220)로 옹립한 후 전권을 휘드르기 시작햇다. 이로 인해190년에는 각지에서 원소를 맹주로 한 반동탁군인 관동군이 결성되었고, 위협을 느낀 동탁은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천도했다. 이때부터 후한은 망국이나 다름없었으며, 중원은 군웅할거 세력으로 들끓었다.
192년 동탁이 부하 여포(呂布)에게 암살당했다. 이에 헌제는 장안을 떠나 낙양으로 돌아왔지만, 난양 역시 폐허가 된지 오래였다. 헌제가 마땅히 의탁할 곳도 없이 곤궁한생활을 하자, 조조(曹操)가 그를 허성으로 모셨다. 조조는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또한 동탁의 토벌군에도 가담했으면, 192년에는 청주 황건적의 투항을 받아 내 청주병을 조직함으로써 정치, 군사적 역량을 확장했다. 그리고196년, 마침내 조조는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허성에 모심으로써 '천자를 옹위하여 제후를 거느린다' 라는 명분을 얻었다. 더불어 그는 허성을 임시 도성으로 삼아 명칭을 허도로 바꾼후, 식량과 군비를 확보하기 휘해 유민과 변방의 병사들에게 둔전을 경작하게 했다. 이로써 조조는 자신의 세력을 더욱 굳건히 만들수 있었다.
한편 원소는 북방의 광대한 지역에서 당시 최대의 군벌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런 와중200년, 서주를 차지하고 있던 유비(劉備)가 조조에게 쫓겨 원소에게 의탁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유비는 조조의 명을 받아 원술을 대패시키고 서주의 주인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그런데 과거 유비가 후한의 외척 동승과 함께 조조를 암살하려던 계획을 세운 것이 조조에게 들통 났고 이에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유비를 토벌하려 하자 유비가 원소에게 몸을 의탁한 것이다. 이일로 원소는 조조의 세가 예상외로 강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200년 드디어 당시 가장 강한 두군벌 세력이었던 원소와 조조가 군사적으로 충동했으며, 이를 관도대전이라 한다.
관도대전에서 조조는 2만의 군대를 가지고 10만의 원소군에게 완벽한승리를 거두었다. 원소군은 조조군에 비해 우세했으나 통솔이 잘되지 않았고, 이에 반해 조조는 뛰어난 통솔과 지략을 발휘했다. 또한 원소의 패배에는 다른 의견이나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성격에서도 원인을 찾을수 있다. 202년 원소가 병으로 생을 마감하자 그의 셋째 아들 원상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곧 형제간의 불화로 세력이 약해졌으며, 204년에 조조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 이로써 조조는 당시 13개의 주 중에서 5개의 주를 차지하여 중원 장악을 이루고, 천하 제패의 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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