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전기(25~88)는 황제의 권력이 강력하여 세습 호족들의 세력을 지배할 수 있었으나 후기(89~189)에 들어서면서 그 정세가 바뀌어 외척을 대표하는 호족들의 세력이 황제의 권력을 능가하는 일이 종종 나타났다. 그 대표적 인물은 외척 양기(梁冀)형제였다.
양기는 원래 일정한 직업이 없는 불한당으로 승냥이와 같은 눈매에 독수리와 같은 어깨를 가졌으며 성질 또한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매사냥, 말타기, 닭싸움, 도박 따위로 세월을 보냈으며 그와 접촉하는 인물들이란 궁정 내의 다방 마담, 환관, 낙양거리의 건달패 등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누이가 순제(順帝)의 황후가 되면서 그는 서서히 권력을 손에 쥐게 됐다.
영화 9년(144) 순제가 죽고 두 살이 황태자 유병이 충제로서 즉위하고 양태후가 섭정하게 되었다.
후한의 역대 황제가 단명하고 황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징크스처럼 되어 있었다. 후한의 황제 가운데서 초대 광무 황제만이 장수를 누렸고, 또한 광무 황제의 황후만이 아들을 낳았을 뿐, 그 후의 황제는 모두 단명하고 황후는 모두 아들 복이 없었다. 충제유병도 즉위한 이듬해 정월에 죽으니 나이 겨우 3세였고 재위 5개월에 불과했다.
충제가 죽자 대신들은 후계 황제를 세우는 데 지금까지 취해 오던 방법과는 달리 나이가 많은 황족을 골라 세울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어린 황제를 세울 경우 황태후가 섭정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외척이 권세를 휘둘러 정치가 문란해지기 때문이었다.
후한말 권력의 핵심집단인 환관과 외척이 중앙정부에서 서로 정권 다툼이나 벌이면서백성의 삻은 전혀 보살피지 않았다. 매년 반복해서 선비, 오환, 흉노, 각족 등 북방의 이민족이 쳐들어와 인민을 약탈해도 조정은 이를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배계층의 사치와 축재를 위해 무한 수탈을 계속하니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영위하기는 커녕 최소 한의 생존자차 불가능한 상황이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거나 도적떼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일어난 것이 황건적의 난이었고, 그 후 계속해서 일어난 반란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소한의 안보와 사회질서도 유지하지 못한 후한 왕조는 전혀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었고, 이때문에 결국 스스로 망한 것이다.
후한 왕조가 스스로 붕괴했을 때, 중국은 국가가 없는 상태 즉 '사회계약론' 에서 말하는 자연상태로 되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하고자 강도단을 구성해 노략질을 일삼았고, 이강도단들이 확대돼 한 지역을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지역강도단들이 등장하게됐다. 이것이 바로 "삼국지"의 배경이다. 위, 오, 촉 세 나라도 이러한 지역강도단 즉 패에 불과한 것이고, 유비나 조조, 손권도 따지고 보면 임자없는 나라의 권력을 움켜쥐자 부나방처럼 뛰어든 강도단 두목 출실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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