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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천하통일을 이룩한 진시황제

      통일한 진나라의 영토는 굉장히 넓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나라로 분할되어 각각 다스려졌다. 당연히 지역마다 관습과 생활전반의 기준이 서로 달랐다.

      진시황제는 백성들의 삶에관한 것들을 먼저 통일했다. 문자와 그리고 화폐, 법률, 각종 제도, 수레바퀴의 폭(幅), 도량형(度量衡) 등등을 통일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과히 혁명적이었다. 이때 통일된 모든 것들이 현대의 중국에까지 큰 변화 없이 내려오고 있다. '도량형'의 도(度)는 길이를 측정하는 자, 량(量)은 부피를 특정하는 되, 형(衡)은 무게를 측정하는 저울을 말한다. 그리고 도로망을 혁신적으로 개선하였는데 수도인 함양을 중심으로 하여 방사선 형태로 도로를 구축하였다. 동쪽으로 산동과 하북, 남쪽으로 호남과 강소, 그리고 북쪽으로 내몽골 자치구의 음산까지 서로 연결되는 장대한 도로였다.

      당시에 토목 기술로 이렇게 거대한 도로를 개설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데, 진시황은 한 발짝 더나아가 총연장 331km에 달하는 대운하(大運河)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214년 사록(史祿)에 의해 건설된 운하는 상계운하(湘桂運河) 혹은 진착거(秦鑿渠)라 불렸다. 이운하는 호남 지역에 있는 상수(湘水)와 광서의 계(桂) 지역에 있는 이강(漓江)를 연결하는 수로로, 배가 산을 넘어 강에 닿을수있도록 계단식과 갑문식으로 설계되었다. 배가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출발하면막힘없이 대륙 남쪽의 바다 입구인 번우에 도달할수 있었다. 번우는 지금의 광동성 광주(廣州)이다. 이 운하는 당나라 때부터는 영거(靈渠)라 불렸는데 현재도 그렇게 부른다. 그리고 왕조가 바뀌어도 이운하는 계속적으로 개발, 발전되었으며 현재도 그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남쪽 지역을 반으로 가르는 대유령(大庾嶺)에 길을 만들어 장강(長江)과 주강(珠江) 유역을 서로 만나게 개통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북쪽 지역에서는 당시의 건축 기법으로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공사인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기 시작하였다. 흉노 등 오랑캐의 남침을 막고자 시작한 역사였다. 공사는 기존에 건설되어 있던 약 2000km에 해당하는 연나라 장성, 진나라 장성, 조나라 장성을 연결하는 공사였다.

      단기간에 대륙 전체에서 벌어진 도로, 운하, 장성의 대공사는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였으며 그에 따라 민심은 불평불만으로 요동을 쳤다. 당시의 인구가 약 3,00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정도 의 노동력을 가지고 동시다발로 엄청난 토목공사를 할수 있었다는것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하지만 부작용이 없을수 없어 통일 진나라 각 지역에서 반란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래도 단기간에 걸친 진나라의 개혁들은 그이후 모든 왕조의 통치 수단이 되었고 백성들 생활의 기준이 되었다. 실로 놀라운 변화였고, 개혁이었다. 진시황을 중심으로 재상 이사 그리고 대신들은 넘치는 정력과 열정으로, 중국의 모든 왕조가 오랜 세월동안 이룩한 것들을 합친것 보다도 더욱 찬란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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