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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숙명적인 요나라와의 항쟁

 송나라 초기 태조와 태종의 치세 30여 년간은 송왕조의 창업 시기였지만 이 시기에는 북쪽의 거란족인 요왕조가 내분으로 혼란에 빠져 남쪽 송나라에 압력을 가할 여유가 없었던 행운의 시기였다.

 937년 나라 이름을 요로 바꾸었던 거란은 982년에는 다시 거란이라 칭했다가 1066년에는 다시 요로 고쳤으나 여기서는 편의상 요라 칭하기로 한다.

 내분으로 혼란했던 정국이 일단 안정을 되찾자 1004년 9월, 요느 20만 대군을 황하의 북쪽 언덕까지 남하시켜 포진하고 송나라에일격을 가할 태세였다.

 이 보고를 받은 송의 황제 진종은 급히 중신들을 모아 대책을 의논했다. 부재상 격인 왕흠약. 진요수는 우선 요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남 출신인 왕흠약은 수도를 금릉으로 옮길 것을, 사천 출신인 진요수는 성도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모두 자신들의 고향에 수도를 옮기려 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한 진종은 재상 구준을 불러 천도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구준은 황제와 두 부재상을 앞에 놓고 사건의 경위를 전혀 모르는 척 말했다.

 "남쪽으로 천도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완전히 국가를 멸망시키려는 계책입니다.누구의 계책인지는 모르오나 폐하께 이따위 엉뚱한 말을 하는 자는 목을 베어도 시원치 않다고 생각되옵니다."

 구준은 정세를 소상히 분석, 설명하고 군대를 거느려 요군을 맞아 싸울 것을 제안했다.

 그해 10월 구준 등의 거듭되는 재촉에 못 이겨 송의 진종은 마침내 무거운 허리를 일으켜 개봉에서 친정에 나서 북상했다. 그러나 진종이 미처 황하 남쪽 언덕에 이르기도 전에 중신들이 동요하여 다시 남방 천도설이 나왔다. 구준은 이런 말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요나라 군사가 이미 코앞에 다가와 있어 형세가 매우 긴박합니다. 폐하께 남은 길은 오직 전진이 있을 뿐 한 걸음도 후퇴할 수는 없습니다. 전진하면 우리 군사의 사기는 올라가고 적은 간이 콩알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나 후퇴하는 일이 있으면 우리 군사는 삽시간에 와해되어 적군의 생각되로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개봉은 말할 것도 없고 금릉도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될지 모릅니다."

 송의 진종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 북상을 계속했으나 황하 남쪽 언덕에 이르자 그 이상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요나라 군사가 전주에 모여들어 3면에서 포위 공격을 감행해 왔다. 송나라 대장 이계릉 등이 성을 나와 이들을 맞아 싸웠다. 이 싸움에서 요의 장수 소달람이 활에 맞아 전사하자 요나라 군사는 겁을 먹고 퇴각하여 성 멀리 도망쳐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구준은 진종에게  황하를  하북에 진출해야 한다고 자주 진언했다. 도지휘사 고경도 구준의 제안을 지지하여 진종에게 황하를 건널 것을 권했으나 진종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에 고경이 부하에게 지시하여 진종에게 탈 것을 갖다대며 진군을 재촉했다. 

 "폐하께서 황하를 건너 하북에 가시지 않는다면 하북의 백성들은 실망하여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할 것입니다."

 그러자 진종을 모시는 문관 양적이 임금에 대한 예를 잃는 처사라고 질책했다. 고경은 버럭 성을 내며 큰소리로 꾸짖고 그대로 진종을 옆에 끼고 황하를 건넜다.

 "경들은 이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예의 따위를 따지는가. 그렇다면 한번 시라도 지어 요나라 군사를 멀리 쫓아 버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잠시 후 진종의 수레가 전주에 이르러 북성에 도착했다. 진종이 북송의 망루에 오르고 천자의 깃발이 힘차게 나부까지 성 안팎의 군사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고, 그 만세 소리는 북성 주위 수십 리까지 메아리쳤다. 요나라 군사는 만세 소리를 듣고 더욱 사기가 떨어졌다.

 그러나 송의 진종은 이렇게 유리한 정세 앞에서도 행재소에 틀어박혀 벌벌 떨고만 있었다. 진종은 사자를 구준이 있는 곳에 보내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오도록 했다.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구준은 부장들을 모아 술을 마시며 연극을 구경하거나 잡담을 하고 있습니다."

 사자의 보고에 진종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겠군."

 한편 요군의 진지에서는 요의 소태후가 초조함에 떨고 있었다. 출진 부대는 패전하고 통수 소달람은 전사한 데다 요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그 위에 요군을 넘보는 각지의 송의 원군들이 전주에 속속 집결한다는 정보까지 들어왔다. 이런 불리한 정세하에서 요군은 본국과 멀리 떨어져 고립되어 있으니 만약 후퇴한다 해도 그 후퇴하는 길에서 송나라 백성들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소태후는 송나라에 사자를 보내 강화를 제의했다.

 요나라의 강화 교섭을 받은 송나라에서는 재상 구준이 이 기회에 연운 16주의 반환을 요구할 것을 주장했다. 구준은 만약 요가 연운 16주의 반환을 거부할 경우 다시 결전을 벌여야 한다고 상주했으나, 송의 진종은 행여 강화의 기회를 잃을까 두려워 구준의 상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급히 대신 조이용을 강화 교섭 사절로 삼아 요나라에 보냈다.

 여나라와 강화 교섭을 벌이고 돌아온 조이용은 요나라가 연운 16주 가운데 후주 세종 때 빼앗긴 관남의 땅(영주, 막주, 역주 등)을 반환해 줄 것을 제시했다고 교섭 결과를 보고했다.

 진종은 영토는 절때 할양할 수 없고 그 대신 옷감과 돈을 주는 조건으로 강화를 추진하라고 명했다.

 재상 구준은 계속해서 강경책을 주장했다. 관남의 땅 할양은커녕 반대로 연운 16주를 송나라에 반환할 것과 요나라가 송나라에 대하여 신칭할 것 등을 요구했다. 구준은 이러한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결전을 벌일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진종의 마음은 이미 강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윽고 구준이 전쟁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 한다는 비난의 소리마저 일자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구준도 강화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1005년 1월, 마침내 송과 요 사이에 강화가 맺어졌다. 그 조건은 첫째, 송과 요는 형제의 의를 맺어 요나라 황제는 송나라 황제를 형으로 섬길 것, 둘째, 송나라는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요나라에 보낼 것 등이었다. 이 강화 교섭은 전연군에서 이루어졌기 대문에 역사상 `전연의 맹`이라 부른다.

 이후 약 40년간 양국 관계는 안정을 유지했다. 이로써 남북 간의 싸움은 일단 수습되었으나 서북 지방에서는 다시금 전운이 감돌았다. 송나라와 서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송과 서하의 싸움은 2년 남짓 계속되다 경력 4년에 마침내 강화가 성립되어 서북 지방의 평화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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