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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진 시황의 6국 통일

    영정은 기원전246년에 13세의 어린나이로 왕이 되였기 때문에 초기 국정은 재상여불위(呂不韋) 섭정으로 운영되였다. 그로부터 10년후 영정은 친정을 시작하면서 태후의 애인이었던환관 노애(嫪毐)가 일으킨 난을 계기로 여불위를 파면 시켰다(건장한 남자였던 노애를 환관으로 위장시켜태후의 궁으로 들여보낸것이 여불위였기 때문이다). 이후 영정은 초나라출신의 법가 학자 이사(李斯)를 승상으로 기용하고, 한나라 출신의 정국(鄭國), 위나라 출신의 위료(尉繚)등을 발탁하여 통일 대업에 시동을 걸었다. 

기원전 230~221년, 즉 약 10년 사이에 진나라는 나머지 6국을 멸망시켜버렸다.

제일 처음 멸망한 왕조는 한나라였다. 진나라와 국경을 마주 접하고 단 한번도 천하를 호령해보지 못하고 항상 약소국으로 존재해왔던 한나라는 기원전 230년 진나라 장군 내사승이 이끄는 대군에게 수도인 신정을 함락당하였다. 한나라 마지막 왕인 한안은 항복을 선언하고 투항하였다.

한나라는 진나라가 공격해오자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한나라에서는 한비를 하찮은 선비로 보고 등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시황이 한비가 저술한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한비를 불러 진나라에 보냈다.

평소 한비를 흠모해온 진시황은 한비를 자신의 곁에 두고자 하였으나 과거 순자의 산하에서 동문수학한 재상 이사가 한비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는 바, 한비로 인해 자신의 자리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한비를 모함하였다. 이사는 중신인 요가와 공모하여 진시황에게 고하였다.

"한비는 한(韓)나라 사람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그를 등용하신다면 한비는 한나라를 위해 일을 하지, 진나라를 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등용하지 않은 채 한비를 진나라에 오랫동안 두신다면 스스로 후환을 키우는 것입니다. 법에 따라 죽이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됩니다."

이에 진시황은 일단 한비를 옥에 가두었으나, 한비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하여 한비를 사면해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한비는 죽어버린 상황이엇다. 감옥에 갇힌 한비를 이사가 독약으로 살해해 버리고 자살로 위장했다.

한비는 「한비자」를 쓴 전국시대 법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는데 그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영정은 소양왕(昭襄王)이 채택했던 원교근공"먼곳의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하는것을 의미한다" 의 계책을 이어갔다. 이에 따라 영정은 인접한 한나라와 위나라를 적극 공략하고, 초나라와는 친교를 맺어6국 간의 연락 체계를 뭐너뜨리고 전시상화이 닥쳐도 서로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각국에 첩자를 보내 군신 관계를 이간시키고, 장군과 대신들을 매수했다. 이렇게 6국을 종합적으로 약화시킨 영정은 기원전230년, 한나라의 멸망으로 시작된 통일 대업은 기원전 221년, 마지막 제나라가 멸망하기까지 불과 10년의 세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기원전221년, 통일 대업을 이룩한 진 영정은 알단 자신을 칭하는 호칭부터 바꿨다. 영정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지배자임을 과시하고자 자신을 '황제(皇帝)'로 칭할것을 명했다. 아울러 황제의 사후에 생전의 업적에 따라 신하가 시호를 붙이는 것을 불허하고, 처음의 황제는 시황제(始黃帝), 이후의 황제는 2세황제, 3세황제라고 칭할것을 명했다. 군주의 호칭 개명은 진나라 왕 영정이 통일 국가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단행한 첫 번째 정책으로, 이때부터 중국 역사에 황제가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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