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陶淵明)은 동진(東晉) 사람으로 365년경 태어났으며, 집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오류(五柳)선생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는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차별을 받아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뒷날 팽택(彭澤)현 현령으로 있을때 어느 날 우연히 상급기관의 관리인 독우(督郵)를 만났는데, 독우의 부하는 도연명에게 "의관을 갖추어 공슨히 엉접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겨우 다섯 말(오두미<五斗米>)봉급 때문에 어린아이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면서 벼슬을 내놓았다. 현령 자리에 있은 지불과80여일밖에 되지 않았을 때 였다. 그뒤로 그는 두번 다시 관직을 맡지 않았다.
归去来兮, 田园将芜胡不归?既自以心为形役,奚惆怅而独悲?悟已往之不谏,知来者之可追。
(자,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이미 내마음은 형체의 노예로구나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지난 잘못은 이미 돌이킬수 없지만
내일의 일은 잘 해낼수 있음을 안다)
천고은일지종(千古隱逸之宗)으로서 '은일시인(隱逸詩人)'이라 칭해지는 그는 "동쪽 울타리에 있는 국화꽃을 따며, 한가로이 남산을 쳐다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의 시구로 유명하다. 그의 '음주(飮酒)'라는 시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마치 꿈꾸는 듯 아늑하고도 몽롱한 이상향을 그린 그의'도화원기(桃花源記)'는 기나긴 남북조 시대의 분열과 혼란을 벗어나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이상향을 꿈꾸는 작가의 염원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귀거래사'와 '도화원기' 등과 같은 담담하고 질박하며 서정적인 시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수십년동안 전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양나라 소명태자 소통(蕭統)이 도연명 시를 손에서 놓지 않고 애송하면서 「도연명집」을 직접 엮어 편집하고 서문을 썼는데, 이「도연명집」이 바로 중국 문학사상 최초의 문인 전집이다. 이후 도연명의 성가는 높아져 이백, 구양수를 비롯한 후대의 대시인들은 모두 그의 시를 높이 평평가하였다.
오두미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는 그의 정신과 기개는 후대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
도연명의 사상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 그의 생사관과 자연관을 들 수 있다.
도연명의 「잡시(雜詩)」중
내 집은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이요.
나는 떠나가야 할 나그네 같구나.
떠나가서 어디로 향할 것인가.
남산에 본래의 집이 있다네.
생전에 살던 집은 잠시 머무는 여관이니 때가 되면 옛 집, 즉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자연의 변화에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안연지는 도연명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언급하여, "죽는 것을 돌아가는 듯이 여겼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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