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때, 어린아이들이 뜰에서 놀고 있엇다. 한 아이가 커다란 항아리에 올라가 놀다가 그만 미끄러져 항아리 속에빠지고 말았다. 항아리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서 아이는 허우적거렸다. 당황한 아리들은 어쩔줄 모르고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이때 한 아이가 돌을 들어 항하리 쪽에 던져 항아리를 깨 뜨렸다. 그러자 항아리의 물이 비로소 빠지면서 물에 빠졌던 아이가 살아날수 있었다. 돌로 항아리를 깨뜨린 아이가 바로 사마광(司馬光)이었다. 당시 나이 일곱 살이었는데, 이미「좌씨춘추」를 읽고 그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사람 살리는 법도 알고 있었다. 이공경은 '소아격옹도'라 하여 오늘날까지 개봉과 낙양에 그림으로 많이 걸려 있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역사를 거울,즉'감(鑑)' 으로 묘사하였다. 오늘의 현실을 역사라는 거울에 비춰 평가하고 성찰해나가 미래를 준비한다는 의미이다.
「자치통감」은 북송(北宋)의 대학자 사마광이 찬술하였다. 처음에는 전국시대에서 진(秦)나라2세 황제 까지의 편년사인 「통지(通志)」8권을 지어 영종(英宗)에게 바쳤는데, 책이 너무 방대하여 황제가 책 전체를 볼수 없었으므로1066년 서국을 설치하여 계속 편찬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에 유서, 유반, 범조우등의 도움을 받아2제(2帝) 19년 만인 1084년에 비로소 이저작물을 완성하였다.
신종(神宗)은 "지난일을 거울삼아 치도(治道)에 도움이 되도록한다."는 의미에서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체294권에 이르는 엄청난분량의 역사서로서 별도로고이(考異)와 목록이 각30권씩이다.
「자치통감」이 책으로 완성된 것은 송 철종(哲宗)때인 1086년이다. 인쇄본은 그로부터6년 후에 나왔다.'통감'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사마광은「자치통감」저술 이외의 뚜렷한 정치적 업적이 없다. 그는 일평생 그야말로 거친 음식을 먹고 소박한 옷을 입으며 성실하고 담백하게 삶을 살아간 인물이었다. 그 스스로도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히 뛰어난 점이 없다. 내 평생의 모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 할것이 전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 사람들의 존숭을 받았다.
사마광은 보수파의 거두답게 줄곧 존군(尊君)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였고, 이러한 시간은 「자치통감」서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를테면, 그는"매자를 의심한다(疑孟)"라는 표현으로 역성혁명을 주장한 맹자를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중앙정부와 역대 군신들의 공식적인 사적 기록에만 중점을 두어 노중련이라든가 「사기」의유협열전인물등을 기술하지않았다. 그는 심지어굴원조차도 언급하지 않았다.또한 사마광 은 덕망과 재능을 분별하는데 있어 덕망을 지나치게 중시허면서 재능을 경시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송나라 정계의 두 라이벌, 왕안석과 사마광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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