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杜甫)(712~770) 는 자가 자미(子美)이고 하남성 공현(鞏縣) 태생이다. 장안의 두릉과 가까운 소릉에 산 적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소릉야로(少陵野老)'라고 불렀다. 그래서 후에 사람들은 그를 두소릉이라 하였다.
두보의 할아버지 두심언은 유명한 시인 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 부터 시와 관계가 깊은 환경에서 자라났다. 두보는 이미 일곱 살때 '봉황시'를 써서 주위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다.
두보는 스무살에 천하를 유람하면서 많은 걸작을 남겼으나 과거에는 낙제하였다. 그후 낙양에서 이백을 만나고 다시 장안에 돌아왔을때, 그의 나이35세였다. 그 다음해 현종이 널리 인재를 구하는 조서를 내렸다. 그래서 두보는 이시험에 응시하여 좋은 답만을 제출했으나, 웬일인지 또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시험의 총 책임자는 간신 이림보였는데, 그는 훌륭한 인재가 조정에 들어오면 자신을 위태롭게 할수 있다고 생각하여 응시자 전원을 낙방시켰다. 그러면서 현종에게는 "폐하의 명령에 따라 신이 열성으로 인재를 구하려 했지만 끝내 인물을 발견할수 없었습니다. 이제 재야의 어진 인물은 없는 뜻 합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두보는 스물아홉살이 되던 해 결혼했다. 부부는 장안 부근의 수양산에서 서로 아끼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두보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만 갔다. 그러는 사이에 두보는 아들이 끝내 굶어죽는 등 이루 말할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반란 진압에 나섰는데, 이때 이백은 남쪽에서 이 대열에 참여하여 현종의 열여섯 번째 황자인 영왕의 막하로 들어갔다. 그런데 후에 영왕은 제위에 오른 형 숙종으로부터 반역자로 몰려 토벌당하고 이백도 체포되어 사형될 위기에 몰렸으나 전에 도와준 바 있던 곽자의 장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석방되었다.
이백은 구후 강남 지방을 방랑하다가62세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한편 두보도 이때 커다란 고통을 겪어야 했다.두보는 난리를 피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강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숙종이 영무 지방에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는 가족들을 떼어놓고 영무로 향했으나 도중에 반란군에 체포되어 장안에 유폐되었다. 그는 아홉달 후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이 있는 행재소로 달려갔다.
두보는 그곳에서 좌습유라는 벼슬을 얻었으나 그의 솔직한 충언은 도리어 황제의 반감만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그는 추방되고 말았다.
두보는 이때부터 각지를 방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전쟁과 부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크나큰 고통을 직접 목격하였다. 두보 자신도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다.
만년에 접어든 두보의 생활은 더욱 고통으로 이어질 뿐이였다. 그는 장강 중류 지역을 방랑하다가 마침내 호남성 악양 부근의 강에 떠 있는 낡은 배 안에서 병사하였다. 이때 두보의 나이 5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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