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戰國) 시대부터 이미 여러 제후의 나라에서 자국의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그 국경선에 장성을 쌓은 일이 있었다.
제나라의 장성은 산동반도를 둘러싸도록 낭야산에서 태산 방향으로 쌓았으며 초나라의 장성은 여수와 한수에 걸쳐 쌓았다. 특히 진나라. 조나라.연나라 등 세나라는 북쪽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각 장성을 쌓았다. 황하중류의 이른바 중원에 가까운 위나라도 장성을 쌓앗다.
천하가 통일되자 이 같은 장성은 오히려 교통을 방해할 뿐으로 불필요한 곳에 있는 장성은 철거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북쪽에서 흉노세력이 강성하여 장차 국경을 위협할 염려도 있었기 때문에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로선 흉노를 저지하기 위해서도 북쪽에 있는 장성은 철거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더 보강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진시황은 장수 몽염 으로 하여금 30만의 구사를 거느리고 북쪽 오랑캐를 쫓아 버리고 장성을 축조하도록 명하였다. 몽염은 장성 중간마다 높고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여 관새(關塞), 즉 관문과 요새를 만들면서, 임조(臨兆)에서부터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일만여 리에 달하는 대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니 실제로 당시의 장성은 동쪽의 요양(遼陽)에서 서쪽 지방인 감숙성(甘肅省)의 민현(岷縣)까지 연결되어 있었으며, 위치도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험준한 산에서 노숙하면서 어려운 공사를 해야 하는 병사들과 인부들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공사의 책임자인 몽염 장군도 10년의 세월 동안 상군(上郡)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공사를 지휘감독하여야 하였다.
훗날 명(明)나라 때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증축과 개축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총연장 2,700km, 지선까지 합치면 5,000~6,000km에 달하는 장대한 성벽이다.
만리장성은 오랜 세월을 통해 수많은 왕조가 각각의 필요로 신축증축 개축을 하였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구조도 아니고 벽돌의 재료도 같지 않았다. 장성의 구조를 보면 일부 구간의 이층으로 되어있는 곳도 있고, 높이가 6m~9m, 폭은 아래쪽이 평균적으로 9m, 위쪽이 4.5m이며. 100m 간격을 두고 망루를 설치하여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재료를 보면 햇볕에 말린 벽돌과 그것을 불에 구운 전(塼), 그리고 돌인데 이들을 쌓은 후 찹쌀로 접착(接着)시켜 견고하게 하였다 한다. 그리고 벽돌을 험준한 공사 현장까지 옮기는 데 산양(山羊)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왕조가 백성들을 혹사하면서 건축한 만리장성은 실제로 방어를 위한 북쪽까지 영토를 확보한 만주족(滿洲族)의 청(淸)나라, 몽고족(蒙古族)의 원(元)나라 그리고 북방 정벌을 열심히 하였던 당(唐)나라 때는 오히려 방어용 성벽인 만리장성이 거추장스럽고 군사적으로 존재의 가치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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