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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적벽대전[赤壁大戰]

중국 후한() 말기에 조조()가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과 싸웠던 전투이다.

관도의 대전에서 원소를 물리친 후 8년째 되는 건안 13년에 조조는 중국 북부를 완전히 통일하고 공격 목표를 남쪽으로 돌려 형주와 강동을 집어삼킨 다음 전국 통일의 대업을 성취시키려 했다.

때마침 형주의 유포가 죽고 그의 막내아들 유종이 유표의 뒤를이은 때였다. 유종은 조조의 백만 대군이 형주를 향해 남하 하고있다는 말을 듣고 겁에 질려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했다.

유비가 있는 신야 일대는 조조군과 유종의 군사에게 완전히 협공당한 형세가 됐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는 이미 조조군이 가가이 다가와 있었다. 유비는 급히 강릉를 향해 퇴각 했다. 강릉은 군사상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병력과 물자의 중요한 보급 기지였다.

유비가 강릉을 향해 퇴각한다는 사실을 들은 조조는 5천의 기병를 거느리고 유비의 뒤를 추격했다. 조조는 주야를 쉬지 않고 300리 길을 하루에 달려 곧바로 장판파에 이르러 유비를 공격했다. 유비는 대패하여 지름길을 따라 하구로 도망쳤다. 하구에는 유포의 장남 유기가 주둔하고 있었다. 유기의 병력과 유비의 군사를 합치니 약 2만이 되었다. 유비는 장판파 싸움에서 처자를 버리고 도망치는 곤욕을 치렀다.

조조의 백만 대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의 접한 강동의 손권은 군사를 시상에 주둔시킨 채 정세의 변화를 예의 주시 했다. 조조군의 남하의 크게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확실한 대책이 없어 우선 노숙을 파견하여 상태를 탐지하도록 했다.

노숙은 북으로 올라가고 유비는 남으로 내려오면서 두 사람은 당양에서 만났다. 노숙비 유비에게 손권과 연합할 것을 제의하자 유비는 제갈공명을 시상에 있는 손권에게 파견해 대책을 세우도록 했다.

공명은 적과 연합군의 정세를 상세히 분석하여 손권에게 설명하고 조조군의 치명적인 약점 그리고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지적,설파함으로써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한다는 손권의 결의를 확고부동하게 만들었다.

조조와 결전을 벌이기로 방침이 결정되자 손권은 주유를 대도독, 정보를 부도독, 노숙을 찬군 교위로 임명하고, 3만의 군사를 주어 유비의 수상 부대와 공동작전으로 조조군과 대전하도록 했다.

이때 적벽의 강 언덕에 포진하고 있던 조조군의 병사는 모두 북방 출신으로서 남방의 풍토에 맞지 않아 병으로 신음하고 뱃멀미로 고통를 받는 등 사기가 떨러져 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조군은 전선을 모두 쇠고리로 연결하여 한덩이로 만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연환선을 만들어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했다. 주유의 부장 황개가 주유에게 계책을 올렸다.

 "조조군은 전선을 연결해 배의 머리와 꼬리가 맞닿아 그 진퇴가 자유롭지 못하니 화공으로 일거에 파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유는 황개의 계책을 받아들여 우선 몽충,투함 10척에 마른 섶과 갈대를 가득 싣고 기름을 부은 다음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포장으로 덮고 그 위에 기를 꽂았다. 그리고 그 후미에는 쾌속선이 따르게 했다.

준비가 완료되자 황개는 우선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항복하러 가겠다는 날짜와 시간에 황개는 맨 앞에서 전선들을 이끌었다. 강 중간 지점에 이르자 일제히 돛을 달고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조조의 수군 진영까지의 거리가 약 1킬로미터 정도 되는 지점에 접근했을 무렵 황개는 재빨리 신호를 올려 각 배에 가득 실은 섶과 갈대의 불을 질렀다. 때마침 세찬 동남풍이 불어대자 황개의 선단은 맹렬한 불꽃을 튀기면서 쏜살같이 조조의 함대로 돌진했다. 쇠고리에 꼼짝 못하게 연결해 놓은 조조의 함대는 도망치려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삽시간의 불길의 싸여 강 언덕의 석벽까지도 온통 붉게 물들이며 천지가 불바다로 변했다. 조조군은 물에 빠져 죽는자,불에 타죽는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적벽 일대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이 틈을 타 주유의 부장들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마구 무찔러대니 진군의 북소리는 천지를 진동했고 조조군의 목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조조도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허창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적벽대전' 이며, 삼국이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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