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 고대사

이자성(李自成)의 반란

이자성 본명은 홍기(鴻基)이고 연안부(延安府) 미지현(米脂縣)출신이다. 중농(中農)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家勢)가 기울어 어려서부터 목동(牧童)의 일을 했으며, 기마술(騎馬術)과 창술(槍術), 곤봉술(棍棒術)등을 즐겨 익혔다고 한다.

 

명나라는 청나라와의 계속된 싸움으로 막대한 군사비를 감당해야했고 세금을 과중하게 징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중한 세금 부담은 일반 백성들의 생활를 압박했고 세금을 내지 못하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반란이 더욱 거세졌다.

반란군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확대되자 명나라 조정은 홍승주를 총사령관으로 임명, 대군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토벌토록 했다. 이때 반란군의 수는 3만 내지 4만 명에 이르렀으나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홍승주가 거느리는 정부군의 의해 힘없이 패배한 반란군의 수령 왕가윤은 명나라의 부총병 조문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반란군의 수령 왕가윤이 죽었다 해서 반란이 진압된 것은 아니었다. 왕가윤이 죽자 그의 간부였던 고영상이 다시 반란의 무리를 집결시켜 날이 갈수록 그 형세가 확대됐다. 고영상은 자신을 틈왕이라 스스로칭했다. 

이자성은 왕좌괘가 이끄는 농민군에 가담했으나, 1630년 그가 관군에 투항하자 장존맹의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 1631년 장존맹이 명군에 패배하여 항복하자 남은 부대원을 이끌고 허난으로 이동하여 고영상의 반군에 합류하였다.

반란군의 연합 작전이 있음 다음 해에 이르러 반란군의 형세가 점점 침체하면서 7월에는 고영상이 섬서 순무 손전정에게 잡혀 북경에서 주살됐다. 이자성은 고영상의 자리를 승계하여 제2대 틈왕이 되어 끝까지 정부근의 저항했다. 그는 정부군의 취약점을 노려 사천으로 들어가 총병 후양주를 죽이고 각지를 공략했다.

 

그러나 그 후의 이자성은 고전의 연속이었다. 사천의 자동 싸움에서 대패하여 겨우 18기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일도 있었고, 동관 남원의 전투에서도 참패를 당하여 7기만을 거느리고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섬서 남쪽의 상락산 속으로 들어가 은신했다.

재기의 날을 기다리던 이자성은 숭정 14년 낙양을 공략하여 함락하고, 연이어 개봉, 서안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숭정 17년은 중국 역사상 중요한 해였다. 이자성은 이 해 정월 초하룻날 아침 서안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나라 이름을 대순, 연호를 영창이라 정했다. 서안을 서경으로 삼아 장안이라 부르고 스스로 대순왕이라 칭했다.

승승장구 파죽지세로 정부군을 몰아붙인 이자성의 반란군은 북경성 안으로 노도처럼 몰려들었다. 세 아들을 궁 밖으로 피난시킨 숭정제는 황후와 후비들에게 자결을 명하고 자신도 소복 차림을 하고 머리로 얼굴을 가린채 자결했다.

이자성은 관제를 개편하고 상하이 관에 있던 명의 장군 오삼계 토벌에 나섰으나 청의 원조를 받은 오삼계에 대패하여 베이징을 버리고 달아나 10여 년 간에 걸친 대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중국 고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태종 과 고구려 원정  (0) 2020.05.20
산해관과 오삼계  (0) 2020.05.19
적벽대전[赤壁大戰]  (0) 2020.05.15
여산릉(驪山陵)과 아방궁(阿房宮)  (0) 2020.05.12
만리장성( 萬里長城)  (0) 2020.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