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이 북경을 함락하고 자금성 하늘 높이 틈왕기가 펄럭인다는 소식은 청나라에도 즉시 전해졌다. 이때 청나라에서는 태종 홍타시가 이미 죽고 8세 난 어린 아들 푸린이 즉위해 숙부인 예친왕이 섭정으로 정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중국 통일의 야망에 불타던 예친왕은 이 기회에 꿈을 실현하고자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심양을 떠나 산해관 쪽으로 향했다.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군 오삼계는 가중되는 청군의 압력과 이자성 군의 동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아버지 오양으로부터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나는 이자성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너도 일찌감치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오삼계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자성으로부터 군용 자금조로 백은 4만 냥이 전해졌다. 오삼계의 마음은 이자성에게 귀순하는 쪽으로 점점 기울어졌다. 그런데 이자성이 북경에 있는 오삼계의 집을 덮쳐 아버지를 연행해 갔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오삼계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리고 즉시 청나라 예친왕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지금까지 대치하던 명나라의 적 청나라의 힘을 빌려 이자성을 쳐 없앨 작정이었다. 민족 반역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예친왕이 오삼계의 서신을 받고 산해관에 들어간 4월 23일부터 바로 싸움이 시작됐다. 예친왕은 오삼계에게 산해관의 성문을 열고 나가 이자성 군의 주력 부대로 돌격하도록 명했다.
이자성 군은 산해관 북쪽 산으로부터 해안에 걸쳐 20만의 대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오삼계가 성문을 열고 출격하자 이자성 군은 길게뻗어 있는 장사진의 양 날개를 급히 꺽어 오삼계를 포위할 태세를 보였다. 마침내 양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져 수십 번의 충돌이 되풀이되면서 혈전이 계속됐다.
오후가 되면서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며 모래와 자갈이 어지럽게 날리고 우레 소리와 같은 굉음이 양 진영을 맹타했다. 이윽고 어지럽게 날던 모래가 서서히 걷히면서 시계가 환해지는 순간 이자성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자성의 주변에 널려있는 군사들은 모두 만주풍의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변발을 한 상태였다.
이자성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을 채찍질하여 앞장서 도망쳤다. 이자성 군은 뜻하지 않은 만주 군사의 출현으로 당황했을 뿐 아니라 전의를 잃고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자성 군은 여지없이 궤멸되어 서쪽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자성은 영평까지 도망쳐 그곳에서 숨을 돌리고 왕칙요, 장약기 두 사람을 오삼계에게 보내어 강화를 제의했다. 이자성은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을 인질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강화를 낙관했으나 오삼계는 이미 강화를 받아들일 능력마저 없었다. 강화 제의를 일축하고 추격을 계속하자 이자성은 인질로 잡고 있던 오삼계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도망쳤다.
예친왕이 거느리는 청군은 해방군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북경에 입성했다. 예친왕은 무령전에서 명나라 관료들의 조하를 받았다.
예친왕이 북경에 입성한 후 얼마 있다가 청나라 어린 황제 순치제가 북경에 천도함으로써 청나라는 지방 할거 정권에서 명실공히 중국을 통일하는 왕조가 되어 2백 수십 년에 걸치는 청나라의 역사가 펼쳐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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