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정치
중국 유일의여제 무조 측천무후는 어릴 적부터 미색이 뛰어나 열네 살에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뒤 스물네살이던 그녀는 다른 후궁과 같이 머리를 풀고 여승이 되었다. 그런데 태종 기일에 절에 공양 차 간 태종의 아들 고종의 눈에 띄게 되었다.
사실 고종은 아버지 후궁이던 그녀를 남몰래 사모하고 있었다. 그 뒤 궁으로 다시 돌아온 그녀는 능력을 발휘하여 궁궐의 실권을 장악 하였다.
병약했던 고종이 죽은 후 아들 현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두 달만에 폐위되었다.다시 다른 아들이 즉위했지만 그녀에 의하여 또 폐위되었다. 그러고는 아예 자신이 제위에 오르면서(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늦은 나이인 67세에 즉위하였다)당 왕조도 페지하고 나라 이름을 주(周) 로 고쳤다.10년의 수렴청정에 이어 다시 15년 동안 황제로 군림 하였다.
측천무후는 공포 정치로 유명하다. 그녀는 자신의 대한 불만이 커지자 전국 각지에 구리로 만든 궤짝을 설치하고는 밀고를 접수하였다. 측천은 밀고를 공개적으로 장려하였고,밀고하는 자에게는 누구든 관가에서 역마를 제공하도록 하고 밀고하는 여정 중에는 정5품으로 대우하도록 했으며 혹시 밀고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처벌받지 않도록 하였다.
밀도자에게 큰 상을 내렸고, 그 중에서 쓸 만한 자는 관리로 등용하기도했다. 그리고 혹리(酷吏) 래준신(來俊臣)을 어사중승에 임명하였다. 래준신과 그의 부하들은 사람들을 악랄하게 고문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낸 다음 사지로 보냈다.심문을 받고 나온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온전치 못했다.
측천무후는 측근에게 말(馬)을 통제하는 세 가지 물건이 있다고 말한적이 있었다. 하나는 쇠채찍이고,또 하나는 쇠몽둥이며,마지막 하나는 비수였다. 채찍으로 복종하지 않으면 쇠몽둥이로 제압하고 그것도 안 되면 비수로 숨숨통을 끊는다는 것이다. 말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장악하기 어려운 신하들을 상대했음을고백한 셈이었다.
호색
측천천무후 역시 그녀를 모시는 남성 (비빈) 들리었던 (남총)을 총애하며 가까이 하였다.그녀는 즉위 초에 설회의(薛懷義) 라는 준수한 미남 청년을 총애하면서 그를 출가시켜 승려로 위장하여 궁에 드나들게 하였도,70세에 이르러서는 영준한 용모에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던 장역지,장창종 형제를"붉은 분으로 화장시키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혀서"가까이에 두었다.이들(남총)의 수는 매우 많았고,이들을 관리하는 특별기관인 '공학감'(控鶴監)도 설치 되었다. 측천은 불만을 가진 신하들에게 "여자의 몸으로 황제가 되었는데,어찌하여 남자 첩을 두지 못하는가!"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사형소경(司刑小卿) 항언범이 상소하였다. "폐하께서 잠이은을 베푼 것이 오래되어 차마 먼저 형을 내릴 수 없습니다.장창종은 난을 일으켜 죄가 많으니 이는 스스로 허물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잠이은' 이란 귀밑머리와 발가락 사이에 있는 애정,즉 남녀 간의 육체관계를 지칭한한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항언범의 죄를 전혀 묻지않았다.그 뒤 주경칙의상소는 더욱 신랄했다.하지만 측천무후는 오히려 "경의 직언이 아니었으면 짐이 알지 못했을 것이오."라고 하고는오히려 주경칙에게 오색 비단 100단을 상으로 내렸다.
'남총'과 함께 있을 때 "공경 비웃는 것을 웃으며 즐겼던"그녀는 이미 관료들을 완전히 꿰뚫고서 마치 손바닥에 올려 놓고 노는 듯 능수능란하고 대범했다.
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69세에 치아가 새로 나고 79세에 눈썹이 새로 날 정도로 다시 젊어졌다고한다.권력의 힘이었을까?아니면 사랑의 힘이었을까?
군자만조(君子滿朝)
하지만 측천무후는 적재적소의 인재를 잘 기용하였다.
그녀가 기용한 위원충,누사덕,적인걸,요원숭은 모두 면재상으로서 많은 좋은 인물들이 조정에 모두 모였다하여 이 시대를 일러 군자만조라 하였다.그녀는 항상 직접 선비들에게 정책을 물었으며,가문을따지지 않고 등용하였다.그리하여 "관리를 보충하는 수레가 연이어 오고,그래도 남겨진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훗날 현종 때 개원지치(開元之治)의 성세를 이루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요숭과 송경역시 무후가 등용한 인물이었다.
누사덕은 관대 온후하고 결백 신중하여 남이 무례하거나 난폭한 행동을 해도 결코 탓하지 않았다.언젠가 그의 아우가 자사의 임명되었을 때 사덕이 아우에게 물었다."우리 형제가 모두 이렇게 출세하여 총애를 받으면 남의 마음을 받게 될 터인데, 어떻게 그 미움을 면하려 하느냐?" 아우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오늘부터 남이 제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성내지 않고 그 침을 닦겠습니다."그러자 누사덕이 말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걱정을 하는 것이다.남이 네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은 너에게 성이 나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침을 닦는다면 상대방의 마음에 더 불을 질러 그 노여움이 배로 커지게 된다. 침은 닦지 않아도 저절로 마른다. 그러니 웃으며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
누사덕은 언제나 적인걸을 무후에게 추천했는데,적인걸은 항상 누사덕을 공격하였다. 어느 날 무후가 적인걸에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중용한 것은누사덕이 추천했기 때문이오." 이 말을 들은 적인걸은 대궐에서 물러나와 크게 탄식하였다.
"참으로 누사덕의 덕이 위대하구나!" 나는 오랫동안 도음을 받았는데도 항상 그를 비난만 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적인걸은 여러 대신 중에서도 무후의 신임을 가장 크게 받았다.그는 군주의 잘못을 면전에서 서슴치 않고 비판하였으며,조정에서 시비를다투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무후는 늘 자기의 생각을 굽히고 그의 말을 따랐다.그러면서 적인걸을 국로로 존칭하여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적인걸이 죽자 무후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적인걸의 제자 원행중은 학식이 높고 모든 일에 생각이 깊어 적인걸이 그를 중하게 여겼다.원행중은 늘 적인걸에게 직언을 하였다.어느날 원행중이 적인걸에게 말했다.
"스승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있습니다.저는 스승님의 입에 쓴 약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적인걸이 말했다.
"아니지.자네는 내 약 상자 속에 있는 비상약일세.그러니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될 것릴세."
어떤 사람이 적인걸에게 "천하의 도리가 모두 어르신 문하에 모여 있습니다."라고 하자 적인걸은 "어진 사람을 추천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이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오."라며 그 사람을 나무랐다. 무후가 어느 날 적인걸에게 물었다.
"휼륭한 인물을 한 사람 얻고 싶은데,적당한 사람이 있겠소?"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장간지라는 인물인데,나이는 많지만 재상의 능력이 있습니다."
무후는 곧 장간지를 사마에 임명하고 얼마 뒤 재상의 자리에 앉혔다.얼마 후 무후의 병이 중해지자,장간지는 군사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가 장혁지와 장창종 두 총신을 베고 무후로 하여금 태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하도록 강압하였다.
측천은 양위를 하고 당나라 이씨 왕조가 다시 복벽하였다. 이 해11월26일 겨울, 호화롭지만 적막한 연금 생활중 향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무후는 중국 역사상 수명이 가장 긴 황제 중의 한명이었다. 임종 전 그녀는 자신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왕황후와 소숙비 그리고 저수량 등을 사면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또 자신의 황제 호칭을 거두고 황후로 칭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남편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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