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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

항우의 패배

   

'우지신용,천고무이(羽之神勇,千古無二)' '항우의 신묘한 용맹스러움은 천고에 다시 없다.'는 뜻이다.

      그의 용기와 배짱은 그가 어릴 적 진시황의 행렬을 보고서 "저 자의 자리는 내가 취할수 있다!" 고 말한 데에서 이미 엿볼 수 있었다. 그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그의 용맹은 빛났으면, 호방하기 짝이 없는 그의 기세는 그가자신의 시에서 스스로를 평한 바처럼'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그야말로 천하를 뒤덮었다.

       그는 상장군 송이를 마치 초개와 같이 베어 버렸고, 파부침주(破釜沉舟) 로 진나라 대군 을 대파하여 뭇 제후들을 무릎으로 기어 다니게 만들었다. 팽성 전투에서는 3만 병사로 수십만에 이르는 한나라 대군을 격파하였는데, 그 시체가 너무 많아 강물이 막혀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회계군수와 송이를 죽이고, 함양을 도륙한 뒤의제(義帝)를 시해한다. 또 20만명의 진나라 포로 병사들을 산채로 파묻어버리는 장면에서 그의 잔인함은 극에 이른다. 항우는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했는데, 이것이 결국은 민심이 떠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항우는 정이 많고 겸손하며 인자했던 인물이었던것 같아. 항우의 휘하에 있었던 한신은 유방에게 항우의 성격에 대하여"평소 항우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겸손하고 자애로우며 유순합니다. 말투가 부드러우며 병이 난 사람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눠줄 정도입니다. 그러나 부하가 공을 이루어 상과 벼슬을 내려야 할때가 되면 항상 머뭇거립니다. 따라서 이는 다만 아낙네의 인정에 불과할 뿐입니다."라고 평가한 바있다.

       항우는 해하에서 사면초가의 상태에 처했을때, 우(虞)미인과 애마(愛馬)추(騅)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해하가(垓下歌)'를 지어 읊었다. 이때 그의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아내자의 정'은 있었지만, 그는 유방처럼 너그럽게 아랫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불신하고 시기하였다.

       항우는 8천 병사로 시작해서 서초패왕이 되어 천하를 군림했는데, 그명성은 황제를 넘어설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은 갈수록 약화 되었고, 그는 마침내 오강(烏江)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천하를 경영할 큰 뜻이 없었고, 오르지 금의환향(錦衣還鄕)할생각만 있었다. 그러니 그의 실패는 이미 정해진 셈이었다.

       더구나 그는 승부처에서 승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특히'홍문연(鴻門宴)'에서 그의 유일한 모사(謀士)였던 범증의 책략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방을 죽이지 않았던 것이 결국 패착이 되고 말았다.

       항우는 결국 실패하였다. 그는 천하도 잃고 목숨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얻었고, 인심을 얻었다.

       항우는 그 수많은 전쟁을 하면서도 단 한번도 속임수를 쓴적이 없었다. 한번 한말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일을 할때는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는 원직을 지켰다.

       항우가 죽은 뒤 유방은 왕의 예우를 지켜 그를 노공(魯公)으로 봉하여 안장하였을 뿐만 아니라"직접가서 상을 지내고 한바탕 곡을 한뒤 떠났다." 이렇게 자신의 정적으로 하여금 진심으로 애도하고 제사를 지내게 만든 것은 항우가 지닌 인간적 매력 때문이라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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