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이자 군사가.그의 자는 공명(孔明)이고, 호는 와룡(臥龍)이다.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제갈공명은 오나라와 화친을 맺은 후 북벌군을 출동시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운남 지방에서 만족(蠻族)의 추장 맹획(孟獲)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공명은 남정(南征)길에 올랐다. 일곱 차례의 전투 끝에 맹획은 그들의 풍습에 따라한쪽 웃통을 벗어부친 채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이렇게 해서 운남 지방이 평정됐다.
운남 지방을 평정한 후 제갈공명은 행정 구역을 개편하고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운남 일대에서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철제의 호미와 낫, 쟁기, 소를 이용한 밭길이를 도입하는 등 진보된 농업 기술을 보급시켰다. 또 비단을 짜는 직조 기술과 여러 가지 수공업을 교육시켰고, 한편으로는 도로를 개척하여 문화의 교류를 도모했다.
226년 위나라 조비가 죽고 그의 아들 조예가 그뒤를 이었다. 조비가 죽은 이듬해 제갈 공명은 전군을 이끌고 북쪽 위나라 토벌에 나섰다. 위나라에서는 촉한의 황제 유비가 죽은 후 수년 동안 아무런 충돌이 없었기 때문에 촉한에 대한 방비가 소홀했다.
위나라에서는 장군 사마의(司馬毅)를 총사령관에 임명, 전군을 통솔하여 촉한군을 방어하도록 했다. 공명은 위나라 군사를 일단 대파하였으나 군량이 다하였기 때문에 일시 퇴각하였다.
다시 힘을 길러 3년 후에 1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위나라를 공략하고 위수 남쪽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밤붉고 긴 꼬리를 그으면서 큰 별이 오장원(五丈原)의 진중에 떨어졌다. 잠시후 제갈공명은 5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양의(楊儀)와 강유(姜維)가 촉한의 군대를 정비하여 철수 작전을 지휘했다.
공명이 죽었다는 정보가 사마의에게 전해지자 사마의는 즉시 추격전을 벌였다. 사마의의 군사가 점점 가까이 추격해 오자 강유는 양의에게 깃발의 방향을 돌리게 하고 진군의 북을 둥둥 울리며 당장 사마의를 향하여 싸울 듯한 태세를 취하도록 했다. 그러자 사마의는 제갈공명이 죽었다는 정보가 혹시 거짓인가 의심하여 추격을 멈추고 돌아갔다.
이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사마의를 비웃었다.
"죽은 공명이 산 사마의를 도망치게 했다."
공명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7년 동안 6회에 걸쳐 북벌을 감행했다 하여 육출기산(六出祈山)이라는 말이 남아 있다. 기산은 지금의 감숙성 예현 동쪽 기산보(祈山堡)를 가리킨다. 이곳에는 삼국 시대에 쌓아 놓은 성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어 당시의 격전을 대변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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