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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당태종 과 고구려 원정

 

정관 18년(644) 태종은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친정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권선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임금 영류왕을 시해한 다음 보좌왕을 세우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자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해 왔다.

태종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시역의 죄를 문죄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고구려 정벌을 결심했다. 정관 19년 낙양을 출발하여 하북에 이르러 전군에게 진군 명령을 내렸다. 태종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략, 함락하고 그 옆에 있는 백암성(白巖城) 또한 함락했다. 여세를 몰아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고, 안시성을 구원하러 오는 원군을 중도에서 대파했으나 안시성의 수비는 예상 외로 견고했다. 1년 가까이 계속되는 공반전에서 쌍반 간에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때마침 겨울이 되어 나뭇가지는 앙상하고 물은 꽁꽁 얼어붙어 당나라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철수하지 않을 수 없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태종은 할수 없이 철수 명령을 내렸다. 철수하는 도중 어떠한 적군보다도 더 무서운 악천후를 만나 많은 사상자를 냈다.

당나라 측 기록에 의하면 이 원정에서 10개의 성과 7만 호를 빼앗고, 3번의 대회전에서 4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당나라 측 피해는 전사자 3천(자치통감에는 7천), 군마는 10두 가운데 7, 8두를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는 1만 명의 군사에게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 삼아 건너게 했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왔다. 발착수()에 이르니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쳐 군사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황제는 고구려 원정의 실패를 크게 뉘우치며 탄식하기를, ‘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 원정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태종은 할 수 없이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 후 고구려에서는 사죄사(謝罪使)를 보내왔으나 태종은 끝까지 재차 원정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수년 후에는 다시 30만 명의 원정군을 파견했고,제1차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지 2년 뒤인 정관 21년(647), 이세민이 이세적 등을 시켜 다시 고구려 원정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원정군의 군량을 수송하기 위하여 멀리 사천. 운남 등 서남 변경지방의 백성들에게까지 배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지정된 시간까지 배를 납품하기 위하여 집과 전답은 물론 자식들까지 파는 자도 있었고 물가는 치솟고 사회는 크게 혼란했다. 제2차 고구려 원정 역시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세민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또다시 1년 뒤인 정관 22년(648), 다시 설만철을 시켜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을 공격하게 했다. 제3차 고구려 원정이었다. 이 또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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