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가 주장한 탄압책으로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일.
시황제(始皇帝) 34년(BC 213년) 전국의 유생들이 진나라에서 실시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함으로써 불행한 사태가 시작되었다.
철저한 법가로 일관한 승상 이사는 이같은발언에 반론을 제기하여 옛것을 빙자하여 현세를 비판하고 인심을 교란시키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고비난했다. 그 주장의 내용은, 진나라 역사 이외의 다른 서적은 모두 불살라 없앨 것, 다시 옛 시서(詩書)에 대하여 의논하는 자는 사형의 처하고, 옛것을 옳게 여기고 현재를 비판하는 자는 그 일족을 멸할 것 등이었다.
시황제는 이사의 의견을 채용하여 많은 서적을 불살라 버리고 다만 의약 ·점복 ·농업 관계 서적만 남기도록 했다.
이 분서 정책에 대하여 유생들은 크게 불만을 품었고 시황제를 비판하는 자가 속출했다. 시황제는 비판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보다 강경한 탄압 정책을 취했고, 마침내 유생들을 생매장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을 구하는 일에 골몰했던 시황제는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라는 방사(方士)에게 불사(不死)의영약(靈藥)을 구해 오도록 했으나 결국은 그들로부터 우롱만 당하고 말았다. 아무리 방사라도 효험이 없으면 가차 없이 사형의 처하는 것이 시황의 성품이었다. 후환을 두려워한 후생'노생도 결국은 도망치고 말았다. 이들의 행방을 찾고 있던 중에 후생' 노생이 도망하면서 황제인 자신을 비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황제는 크게 노하여 자신을 비방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을 체포하여 결국 460여 명이 구덩이에 매장되는 형을 받았다. 이것이 시황제 35(BC 212년)년의 일로 역사상 유명한 분서갱유 사건이다.
당시 조정에는 박사라고 하는 황제의 자문 관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가, 묵가, 법가, 도가의 학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묵가는 겸애가 사상의 기본인데 너무나 이상적이라 군주의 강력한 카리스마스가 필요한 전국시대부터 국가의 통치철학으로는 적용되지않았다. 그리고 도가 역시 혼란한 전국시대에 군주가 채택하기에는 적당한 이념이 아니었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도가 자체의 실체적인 조직도 없었다. 자연히 공자, 맹자의 철학을 따르는 유가와 관중과 한비의 철학을 따르는 법가만이 살아남아 통치철학이란 현실적인 관점에서 서로 경쟁을 하였다.
진시황의 경우 국가 통치의 수단으로 법가의 이론을 채택하였으며, 당연히 진나라의 정치 사회 전반은 엄중하고 매서운 법 시행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 당시의 도가는 이론의 구성을 다양화하여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앞에 내세우고 음양가의 이론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황금을 만들 수 있다는 연금술과 복용하연 불로장생 할수 있다는 선단, 그리고 신선이 될수 있다는 노장의 사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들로 백성들을 현혹하고 있었으며 진시황 역시 이들의 말을 듣고는 자신의 주변에 두었다.
당시 공자와 맹자의 학설을 따르는 유가를 대유라 하였고 노자와 장자이 학설을 따르는 도가를 소유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구덩이에 묻혀 죽은 사람들은 장생불사의 선단을 만들고 신선이 되고자 하였던 도사들이었으며 그러한 도사를 소유로 잘못 인식하여 진시황이 유생들을 죽였다고 기록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설도있다. 진시황제가 저지른 분서갱유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은 다양하나, 잔혹하고 어리석은 결정임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중국 고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관수조 (0) | 2020.05.25 |
---|---|
정난의 변[ 靖難之役 ] (0) | 2020.05.24 |
당태종 과 고구려 원정 (0) | 2020.05.20 |
산해관과 오삼계 (0) | 2020.05.19 |
이자성(李自成)의 반란 (0) | 2020.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