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명(明)나라 초기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내란.
홍무 31년 홍무제(洪武帝)가 71세로 타계하고 얼만 안 되어 홍무제의 아들과 손자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벌어졌다. 홍무제의 넷째 아들인 연왕 주체와 황태손 주윤문과의 싸움이었는데 이를 '정난의변'이라 부른다.
홍무제를 이어 황태손 주윤문이 즉위하니 이 이가 건문제(建文帝)이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는 청년으로 즉위 당시 22세였다. 무력의 시대가 지나고 바야흐로 문의 시대가 개막된다는 뜻에서 연호를 건문으로 정하였는데 여기에는 건문제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다.
건문제는 제태를 병부상서, 한림원 수찬 황자징을 태상경에 임명하여 국정을 담당토록 했다. 그리고 학문으로 인망이 높은 한중부교수 방효유를 한림원시강으로 삼았다. 제태와 황자징은 정치가라기보다는 건문제와 학문을 토론하는 상대역으로 적합한 인물들이었다.
건문제의 정치는 이 학자들에의해 서막이 열렸다. 이들은 당시의 정치 상황을 전한 초기와 흡사하다고 판단했다. 전한 경제때 각지에 봉해진 황족들이 연합하여 이른바 오초 7국의 난을 일으킨 사실을 상기했다. 명나라도 각지에 황족을 번왕으로 봉하여 각각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왕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자."
이것이 건문제 정권의 기본 방침이었다. 그러나 현실 정치를 처리할 능력이 부족해 역효과를 일으키고 말았다.
제일 먼저 표적이 된 인물은 주왕 주수였다. 주수는 마황후가 낳은 다섯 황자 가운데 막내였다. 건문제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은 연왕(燕王) 주체(朱棣)로 그를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그럴 만한 구실이 없었다. 주왕 주수는 홍무제 생존 시에도 범법 행위가 많았기 때문에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건문제가 즉위한 지 3개월 후인 8월 국경을 경비한다는 명목으로 이경륭이 군사를 이끌고 갑자기 개봉부에 나타나 왕궁을 포위하고 불문곡직 주왕을체포했다. 주왕은 운남으로 유배됐다.
다음 해 4월에는 제왕 주부' 대왕 주계가 폐서인됐다. 이에 불만을 느낀 상왕 주백은 절망한 나머지 분신자살하고 민왕 주편은 장주로 유배됐다. 이렇게 왕호를 박탈당하거나 종신금고 또는 폐서인됐다가 마침내 사형의 처해지는 자도 있었다. 일련의 조치로 각지의 번왕들은 전전긍긍했다.
연왕 주체는 번왕들의 수난은 결국 자신을 노리기 위한 전주곡임을 잘 알고 있었다.
조정에서 북경의 파견되어 있는 포정사 장병' 도사 사귀, 장사 갈성에게 연왕 주체를 체포할 것을 명했으나 연왕이 선수를 쳐 이들을 살해하고 7월 계유일에 군사를 일으켜 수도 남경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출진에 앞서 연왕은 '황실의 위난을 평정하기 위한 군사 행동' 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의 군대를 정난군이라 칭했다.
정난군은 삽시간의 거관용을 돌파하여 회래' 밀운' 준화' 영평등을 잇달아 함락하니 한 달이 채 못 되어 그의 병력은 수만 명으로 증강됐다.
건문제는 경병문을 대장군의 임명하여 연왕의 반란군을 토벌토록 했다. 그러나 경병문이 패전하고 그 후임으로 교체된 이경륭마저 패전하여 덕주가 함락됐다. 후임 성용은 동창의 전투에서 연왕군을 대패했으나 이어지는 전투속에서는 패전을 거듭했다. 이렇게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4년 동안이나 이어지다가 결국 연왕이 승리를 거두었다.
건문제는 연왕군이 노도처럼 궁궐로 밀려오는 것을 보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남경에 입성한 연왕은 우선 건문제를 찾기 위래 궁전의불탄 자국을 샅샅이 뒤졌으나 불탄 황후에 시체만 확인했을 뿐 건문제의 시체는 발견할 길이 없었다.
그 후 건문제는 중으로 가장하여 어디론가 탈출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으나 종적은 찾지 못했다.
연왕 주체는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부득이 즉위한다는 형식을 취하여 제위에 오르니 이 이가 영락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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