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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

한무제

기원전 141년 경제(景帝)가 죽고 그의열한 번째 아들 철(徹)이 제위에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16세였으며 이 임금이 바로 전한 왕조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무제(武帝)이다. 

그는 한왕조 창업 이래 쌓아 올린 문화적. 경제적 여력을 바탕으로 역대 이래 취해 오던 무위(無爲)의 노장 사상에서 유위(有爲)의 정치 체제로 전환했다. 또 수십 년 동안 북쪽의 취해 오던 화친전책을 굴욕적인 것이라 판단하여 공격 위주의 강격책으로 전환했다.

무제는 제후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조정의 대권을 강화했으며 경제면에서는 화폐 제도를 통일하여 정부가 화폐를 주조하고 소금. 철. 술 등의 전매 제도를 채택했다. 사상면에서는 제자백가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고 유가인 동중서(董重舒)의 사상을 받아들여 중앙 집권제의 강화와 국가통일을 굳건히 다지는 여론을 환기시켰다. 내정을 굳건히 다지는 한편 대흉노 정책을 강화하여 무력에 의하여 침략과 소란을 저지시킨다는 강경책을 썼다.

 

한나라 무제는 중국 역사상'진황한무(秦皇漢武)'라고 칭해진 불세 출의 두 황제중 한 사람이다.

"진황한무(秦皇漢武)"는 과감하고도 강력한 정책을 펼쳐 후세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한 무제와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룩했던 진시황을 지칭한다.

한 무제가 즉위했을 때 한나라는 건국한 지 70년을 지나고 잇었다. 정치는 안정되고 국고 또한 충실하였다. 한 무제는 이를 토대로 하여 한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할수 있었다. 한 무제는 연호(年號)를 사용한 최초의 황제였고, 연호는 6년마다 바뀌었다.

무제의 업적 중에도 압권은 흉노 토벌이었다. 흉노족은 중국 북방의 용맹스러운 민족으로서 수백 년 동안 중국을 괴롭혀 왔던 장본인이었다. 진시황조차도 이들을 두려워 하여 만리장성을 쌓았고, 한 고조 유방도 흉노 공격에 나섰다가 오히려 완전 포위되어 모욕적으로 도망쳐 나와야 했었다. 그 뒤 한나라는 흉노와 굴욕적 화약(和約)을 맺고 오직 회유책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웅재대략(雄才大略)'의 한 무제는 이를 묵과할수 없었다. 그는 회유책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격에 나샀다. 무제는 흉노의 본거지까지 대군을 파견하여 공격하였다. 흉노 역시 필사적인 반격에 나샀지만 전세는 점차 한나라쪽으로 기울었다. 특히 위청과 곽거병 장군의 공격은 흉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한편 무제는 흉노 토벌과 함께 적극적으로 서역(西域)진출을 기도하였다. 그는 장건을 파견하여 서역 제국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게 되었는데,  이는 '실크로드'를 열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 무제 시기에 이르러 한나라는 창업 이래 취해 오던 '무위(無爲)'의 노장 사상에서 '유위(有爲)'의 유교 사상으로 전환하였다.트히 동중서의 사상을 받아들여 이후 중국 역사에서 유가 사상이 주류적 지위를 굳히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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