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제(齊)나라 낙안(樂安)사람으로 자는 장경(長卿)이다. 그의 선조 진완(陳完)은 원래 진(陳)나라 공자로 내란 통에 제나라로 도망와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다. 손무의 할아버지 전서(田書)는 거(莒)를 공격하는 전쟁에서 공을 세워 제 경공이 낙안을 근거지로 주고 동시에 '손(孫)'이란 성까지 하사했다.
손무 집안의 성씨(姓氏)는 진(陳), 전(田)을 거쳐 그때부터 손(孫)이 되었다. 사람들은 손무를 병성(兵聖) 혹은 무성(武聖)으로 추앙하였으며 또한 그를 높이 불러 손자(孫子)라고 하였다. 기원전 532년, 제나라에 전(田)·포(鮑)·난(欒)·고(高) '4성의 반란'이 터졌고, 손무의 집안도 이 정치투쟁에 휘말렸다. 이때 손무의 집안은 오(吳)나라로 망명을 가야 하였다. 그후 손무는 대부분의 젊은 시절을 오나라에서 보내면서 천하의 역작인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저술했다.
그리고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왕 합려(闔閭)의 군사(軍師)가 되어 당시 강대국인 초(楚)나라와의 다섯번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고 초나라의 도읍으로 들어갔다.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晉)나라 등을 굴복시켜 합려로 하여금 패자(覇者)가 되게 했다. 손무에 대한 그 후의 기록은 자세히 전해지지않는다. 다만 손무의 무덤이 오현에 있고 그의 후손들이 부춘(富春)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하며, 훗날 전국시대의 전략가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 손빈(孫臏)이 있는데, 그는 손무의 손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손자병법』은 춘추시대 오나라에서 거주하던 손무가 저술한 병법서로서 손무는 이 책을 오나라 왕 합려에게 바쳐 자신의 능력을 시험받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말'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 교전 쌍방의 실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을 적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전제조건이자 정확한 정책결정의 객관적 기초로 보았다. 이유명한 문구는 『손자병법』의 「모공편(謀功篇)」에 적혀 있다. 『손자병법』은 본래 총 82편에 달하였으나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조조(曺操)가 내용의 핵심만을 간추리고 주해(註解)한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13편만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3편의 책 내용 구성을 보면 1. 계 , 2. 작전, 3. 모공, 4. 군형, 5. 병세, 6. 허실, 7. 군쟁, 8. 구변, 9. 행군, 10. 지형, 11. 구지, 12. 화공, 13. 용간 등으로 되어있다.
'知可以與戰 不可以與戰者勝'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다'는 손무의 사상은 강상이나 관중의 비슷한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한 단계 더 승화시켜 이론화함으로써 국가전략을 수립하는 주도적 사상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현실적 의의를 충분히 담고 있는 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