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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

손빈(孫臏)

손빈(孫賓) 춘추시대의 걸출한 군사 전문가로 훗날 '병성' 또는 '무성'으로 추앙받은 손무의  5대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귀곡자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방연()에 의해 배신을 당하고 무릎 아래가 잘리는 빈형(臏刑)에 처해 앉은뱅이가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손빈(孫賓)을 손빈(孫臏)이라고 불렀다.

≪청년 시절에는 방연()과 함께 병법을 배웠는데, 학업 성적이 늘 방연을 앞질러 그의 시기와 질투 대상이 되었다. 학업을 마친 뒤 방연은 위()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혜왕()에 의해 장수에 임명되었다. 당시 제나라와 위나라는 중원의 패권을 놓고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사악한 방연은 손빈의 선조 손무가 남긴 병서를 손에 넣기 위해 손빈을 죽이지 않고 무릎 아래를 잘라내는 형벌인 빈형()을 가해서 앉은뱅이로 만들었다. 여기에 손빈의 얼굴에다 죄인임을 나타내는 경형()의 흔적까지 남겼다.》

그후 손빈은 제(齊)나라로 도망가서 제나라 장군 전기(田忌)의 집에서 식객으로 있으면서 재기와 복수의 칼을 갈았다. 손빈이 제시한 삼사법으로 손빈의 능력을 알아본 전기 장군의 추천으로 손빈은 제나라 군사(軍師)에 임명되었다.

 

손빈에 관한 제반 사항 역시 앞에서 거론하였기에 추가로 말하지않고 손빈의 병법서인 『손빈병법(孫臏兵法)』에 대해서 알아보자. 『손빈병법(孫臏兵法)』은 손빈이활동하던 그 시절에이미 주변에 알려져 있었는데,특히 제나라 위왕(威王)이 손빈의 병법에 관심을 보이고 또한 마릉 전투에서 위(魏)나라 군대를 섬멸하고 천하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손빈병법(孫臏兵法)』8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이 있지만, 그 후에 한나라시대 이후부터 수당시대 사이에서 실전되었고, 그 뒤에 『손빈병법』의 실존여부를 의심하다가, 그 이후에 은작산에서 『손빈병법』 발견되었다. 발견된 죽간본 『손빈병법』에는 죽간(竹簡)이 440매, 전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견된 원문에는 21편의 편명이 남아 있지만, 9편의 편명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인 59편이 발견되지 않아 나머지 편목이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손빈병법(孫臏兵法)』의 내용을 보면 어떤 측면에서는 손무의 병법을 능가할정도로 더욱 깊이가 있게 연구되었다. 손빈의 병법사상 중에는 남다르게 주장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귀세(貴勢)와 지도(知道) 그리고 용법(用法)이다. 귀세는 전쟁의 판세와 형세에 관한 것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을 치룰 수 있는 물자(物資)와 백성들의 지지(支持)라고 하엿다. 지도는 전쟁의 규칙과 원칙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용법은 상대를 제압하며 승리를 쟁취하는 전술의 확실한 운용을 말한다.

또한 손빈은 자신의 병법 사상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조건들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삼사법(三駟法)은 제나라 전기 장군에게 마차 경기를 할때 한판은 지더라도, 나머지 두판을 이겨 최종적으로는 승리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작고 사소한 것은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가 창안한 '삼사법'은 부분적 패배를 이용하여 궁극적 승리로 이끄는 현대 군사학의 원리와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지금도 왕성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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