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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

공자

     

공자(孔子, BC 551~479)는 머리가 언덕처럼 둥글게 생겨 이름을 '구(丘)'라고 불렀다. 흔히 부르는 이름인 자(字)는 중니(仲尼)이면, 공자의 '자(子)'는 고대중국에서 사용하던 존칭이다. 별명은 키가 매우커'키다리'였다고 한다.

      혼란과 전쟁이 이어지던 춘추전국시대(BC 770~221) 때, 노(魯)나라(지금의 산동성 일대)에서 보잘것없던 평민 출신의 하급 무사인 숙량흘과 배우지 못한 안징재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결혼을 하지 않아 정식 부부가 아닌 보모 밑에서 자라야 했다. 아버지마저 3살 때 세상을 떠났고, 얼마 되지는 않던 재산은 이복 누이들과 조카에게 상속되었으며,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없었다. 그뒤 가난한 형편에 눈마저 멀어버린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다. 나중에 공자는 어머니가 죽자 어버지 옆에 묻고 3년상을 지내 부모를 온전하게 해드렸다.

     공자는 어렵고 힘든 성장기를 보내면서도 학문을 익히는 한편 그가 그토록 즐겨하고 중시하던 예번과 음악을 배웠다. 철이 들무렵부터공물의 받침대용기를 늘어놓거나 가지런히 하며 제사를 비롯한 의례놀이를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예로부터 전해오는 전통의 례, 제도, 관습 등에 밝았다. 14세 때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고대중국의 기본사항이자 교양인 '6예(六藝), 즉 예(禮,의례), 악(樂,음악), 사(射,활쏘기), 어(御,말타기), 서(書,글쓰기), 수(數,수학)'를 배워 익혔다.

     스스로 공부하기를 즐겨열심히 하였으며,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면 곧바로 달려가 배움을 청했다. 그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의례와 음악을 배울 수있는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공자는 자신이 갈고닦은 학문과 실력을 세상을 위해 한껏 펼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노나라는 난세에 내분을 겪고 있었다. BC 517년34세의 나이가 되었을때 군주인 노 소공 이 노라라이 실질적인 권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3환씨에 맞섯다가 실패하고, 제나라로 망명 가는 도중에 환란이 일어나자 함께따라갔다. 제나라에서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 지내며 음악에 심취하여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가운데 제 경공(재위 BC 547~490)을 만나 벼슬을 하려 했다.

     제 경공이 공자를 만나 물었다.

     "정치가 무엇입니까?"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즉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을 아들다워야 합니다.

      공자는 천하가 어지럽고 무질서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람이 도덕적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바로잡아 사회질서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그요제로 정명론(正名論)을 설파했다. 군신부자 처럼 사람마다 각자 자신에거 맞고 어울리는 윤리와 질서가 있다고 강조한 뒤 이를 실천하도록 이끌어가면 제나라의 치세도 바로 잡힌다고 주장한 것이다.

       제 경공이 공자를 마음에 들어 하며 기용하려 했으나 제나라의 실력자이자 현신인 안영이 공자의 기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제 경공도 안영이 강하게 반대하자 뜻을 접고 공자에 대한 예우만 잘했지 중용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제나라의 신하들이 공자를 해치려고까지 하자, 결국 공자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노나라로 돌아와야했다. 그러다가 다음해에 노 정공의 요청을 받고 출시하게 되었다. BC 501년 50세에 중도재를 시작으로 오늘날의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까지 직위가 높아졌고 외교를 비롯한 여러 직무들을 맡았다. 그뒤로도 공자는 놀라운 기량을 펼치며 도덕적치와 예의정치를 선보이며 많은 치적을 거두었다.

      BC 496년 공자는 55세의 나이에 대사구로서 재상의 일까지 맡게되자 밝은 얼굴로 정사를 이끌었다. 공자가 노나라의 정사를 맡은 지 3개월이 지나자 상인들이 물건 겂을 속이지 않았으며, 남녀가 길을 갈때 따로 걸었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도 없어졌다. 여행을 가도 관리에게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으며 모두 만족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자는 당대의 실권자로서 군주까지 농단하던 3환씨 가문과 대립하면서 그해에 쫓겨나듯이 노나라를 떠나야 했다. 3환씨의 지도자격인 계환자(계손사)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제나라에서는 '공자가 정치를 하면 노나라가 필히 패권을 잡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나라가 먼저 병합될 것이다'며 여서가 계략을 짯다. 계환자에게 손을 뻗어무녀 80면과 말120필의 아름다운 수레를 보내 함께 모략을 꾸며 공자를 몰아낸 것이다.

      사실 노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3환씨의 발호였다. 이들 세가문은 월래 노나라 제후의 혈통으로 노나라 제후의 성이자 주나라 왕실의 성인 희(姬)였으나, 새로 성씨를 하사받아 각각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가 되어 군주를 압도하는 세도를 형성해 국정을 전단하고 있었다. 이에 공자가 노나라의 최대 과제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가 실패하면서 그의 꿈이 꺽인 것이다.

      공자는 BC496년 이후 수십명이 제자들과 함께무려 14년 동안 자신의 뜻을 펼곳을 찾아 주유방랑을 햇다. 노나라를 떠난뒤 위(衛), 진(晉), 조(曺), 송(宋), 정(鄭), 진(陳), 채(蔡), 초(楚)등의 숱한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제후들과 만나 정치에 관한 유세를 하면서 정무를 맡아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50대중반과 60대가 지나도록 숱한 죽음의 위기까지 넘기면 온갖 역경을 겪었으나 정사를 맡아 뜻을 펼치려던 간절한 염원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내 기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다시 고향인 노나라를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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