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유래: 한식의 풍습중에 가장 특이한 것은 이날만큼 음식을 데워 먹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다.
진 문공인 중이(重耳)는 19년이란 오랜 세월을 고국을 떠나 각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망명 생활을 하였는데 어느 날 중이는 배고픔과 허기에 지쳐 사경을 헤맸다. 그때 중이를 모셨던 신하 개자추( 介子推)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러 중이에게 먹게 하여 중이를 살려내었다.
이렇게 개자추는 자신의 몸을 바쳐 중이에게 충성을 다하였는데, 나중에 진나라의 군주가 된 중이 즉 문공은 논공행상 하면서 개자추에게 아무런 벼슬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개자추는 그것에 실망하지 않고 초연히 늙은 어머니와 함께 면산에 숨어 살았다. 사실은 문공이 논공행상을 시행하던 중에 주 나라에서 변란이 발생하여 지원군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문공은 급히 논공행상을 마무리하려다가 오랜 세월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한 개자추를 빠뜨리고 말았다. 뒤늦게야 개자추에게 아무런 벼슬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 문공은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이미 면산으로 간 지 오래라 진문공은 그를 나오게 하기 위해 면산에 불을 질렀더니 어머니를 업으면서 나무를 붙들고 생을 마감했으며 산이 전소된 뒤에야 진문공은 그 행위를 후회하면서 큰 소리로 하염없이 울었다. 이후 진 문공의 명으로 매년 그의 기일에는 소사한 그를 기리기 위해 뜨거운 음식을 먹지 않고 차가운 음식만 먹었다. 이날이 바로 한식(寒食)과 청명절의 유래다.
중이가 진의 제후 자리에 오른 기원전 643년 시점의 중원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다. 기원전 643년 제나라 환공이 쓸쓸히 죽고, 뒤이어 나타난 송나라 양공은 패자의 흉내만 내다가 초나라 성왕의 공격을 받고 결국 죽었으며, 초나라 성왕은 덕이 부족하여 주변 제후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였고, 무엇보다도 중원의 제후들은 초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인식하여 초나라를 패자의 나라로 인정하지를 않았다.
또한 진의 목공도 지리적으로 중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중원은, 중심이 될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패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시점이었다. 한편 진의 제후가 된 중이는 기존 세력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진나라 조정에서는 과거 중이의 이복형재이자 진 혜공인 이오의 측근 신하였던 극예와 여생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중이가 군주가 되자 앞으로의 일이 걱정된 여생과 극예는 결국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공격하였다. 아직 자기 세력을 구축하지 못한 중이는 위험에 처했고 결국 장인인 진 목공에게 긴급하게 도움을 부탁하였다. 진 목공은 즉시 3,000명의 군사를 파병하여 중이를 구하고 극예와 여생의 반란군을 처단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중이, 즉 문공은 국내 정치를 안정시킨 후, 진 목공의 딸인 문영을 불러오고, 또한 적족에 남아 있던 부인 계외와 제나라에 남아 있던 제강도 진으로 모셔왔다. 진 목공의 딸인 문영은 배경이 가장 좋았으나 정부인의 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리하여 진 문공의 부인 서열은 제강, 계외, 문영(회영)순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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