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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간장막야[干將莫耶]의 검

춘추오패 중 4대 패자와 5대 패자가, 춘추 초기에는 이름도 없던나라, 그리고 남방의 오랑캐로 멸시박고, 인정받지 못하던 오(吳)와 월(越) 나라에서 나온 것은, 여러 가지 역사적 근거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두 나라가 당시 일반 철을 단련시켜 더욱 강한 강철로 만들 수 있는 제련 기술이 뛰어났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강철 검을 만들 수 있는 유명한 제련 기술자가 모두 오나라와 월나라 백성들이었다.

즉 오나라의 간장(干將)과 막야(莫耶), 그리고 월나라의 구야자(歐冶子) 등의 명장이 그들이다. 이 중 간장과 막야는 부부이었다.

오나라 왕 합려의 지시로 간장은 천하 명검 두 자루를 만들게 되었다. 간장은 정선된 청동만으로 검을 주조하기 시작했는데 3년이 지나도록 청동이 녹지 않았다. 청동을 녹이는 방법을 찾기 위해 간장은 노심초사 하였는데 그때 막야가 방법을 찾아내었다.

막야는 부부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용광로에 넣은 후, 소녀삼백 명으로 풀무질을 하게 하였다. 그러자 청동은 거짓말처럼 녹았고 간장은 두 자루의 명검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간장은 한 자루의 검에는 간장, 그리고 또 한 자루의 검에는 막야를 새겨 넣었다.

천하의 명검을 이르는 간장막야[干將莫耶] 성어가 생긴 연유이다.

 

중국의 동남부 오월 지방이나 이 지역에 인접한 초는 하천이나 호수가 많은 지형이어서 군대가 전차보다는 보병과 수군 중심으로 발달되었으며, 이런 역사적· 환경적 결과로 접근전에 유리한 검이 많이 사용되어 우수한 검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방에서는 전설적인 명검의 장인으로 간장()과 막사()를 만든 오나라의 간장, 용연(), 태아(), 공포()를 만든 월나라의 풍호자(), 순균(), 담로(), 호조(), 어장(), 거궐()을 만든 초나라의 구치자()가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그들이 만든 명검의 이름은 후세에까지 전해져 검의 대명사가 되었다. 또한 일찌기 오나라, 월나라, 초나라가 있었던 지방에서는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오나라 왕 부차()나 월나라 왕 구천()이라는 춘추 시대(기원전 8세기~기원전 5세기까지) 왕들의 이름을 새긴 정교한 검이 실제 출토되고 있다.

 

호북성에 있는 강릉 망산의 고분에서 1965년에 발굴된 월왕구천(越王鳩淺)의 명검을 보면 칼날 하단부에 월왕구천 자작용검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발굴 당시 검의 전체가 녹이 슬지 않았고 칼날은 예리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부식되지 않았다.

칼의 양면에는 공작석과 초록색의 유리가 상감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상감, 합금, 제련의 기술이 높은 수준이었다.

오왕 합려의 무덤에서도 삼천 개의 검이 출토되었는데, 모두가 중원의 검과 달리 강철 검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았을 때 오나라, 월나라의 강성함에는 강철 검을 만들 수 있는 제련의 기술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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