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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오월의 싸움

춘추 시대 말 패자가 된 초나라를 위협한 것은 중원의 나라가 아니라 장강 하류에 위치한 오나라와 월나라였다. 초나라는 오나라에게, 오나라는 다시 월나라에게 패자의 자리를 내주면서 주 왕조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과 주 왕조가 분봉한 제후국들을 함부로 병합하지 않는다는 명분이 사라졌다. 남방의 이민족으로 구성된 초나라에게 주 왕조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했던 것처럼 이민족으로 구성된 오나라와 월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 오나라는 주 문왕의 백부인 태백이 건국했다고 하고, 월나라는 하 왕조 소강제의 서자 무여가 시조라고 하지만 모두 확실치 않다. 그보다 이 두 나라는 중국 동남과 남방의 토착 민족을 선조로 하는 백월이 세웠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삼국 군주들은 중원 제후들의 비해 왕으로서 성숙하지 못했고, 북방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서로 치열하게 다툼을 벌였다.

오나라는 수몽(기원전 585~기원전 561)이 진 나라의 `오를 도와 초를 제압한다`라는 정책에 따라 진의 군사 기술을 습득하고 중원의 문화를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했다. 오나라의 국력은 오왕 합려가 초나라 출신 오자서를 재상으로 등용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오왕 합려와 오자서는 각자 왕과 재상이 되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오왕 합려의 경우를 보자. 원래 오왕 수몽에게는 제번, 여제, 여매, 계찰 등 네 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들 중 막내 계찰이 가장 현명했다. 따라서 수몽 사후 뒤를 이은 장남 제번과 오나라 백성은 계찰이 왕위를 잇기를 바랐으나 계찰은 극구 사양했다. 이에 제번은 자신의 아들이 아님 형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마지막에는 계찰이 왕위를 잇도록 했다. 드디어 셋째 여매가 죽고 계찰이 왕위를 이을 차례가 왔으나 계찰이 도망처 버려 왕위는 여매의 아들 요 에게 돌아갔다. 여기에 불만을 가진 이가 있었으니 바로 제번의 아들 광 이었다. 결국 광은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로 출격하여 없는 틈을 이용해 요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이가 바로 오왕 합려였다.

한편 초나라 출신이었던 오자서가 오나라로 오기까지는 무려 16년이나 걸렸다. 16년 전 초나라 태자 건의 소부였던 비무기는 진나라로 태자비를 간택하러 갔다. 그런데 그는 초 평왕의 환심을 사고자 태자비를 초 평왕에게 바쳤고, 초 평왕 사후를 걱정하여 태자 건을 변방으로 추방할 것을 참소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했던 비무기는 태자 건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고해 그를 없애자고 했다. 이에 태자 건의 태부인 오사가 잡혀 오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오자서의 아버지였다. 초 평왕은 오사를 인질로 삼아 오사의 아들 오상과 오자서까지 잡아들이려고 했으나, 오자서는 태자 건이 피신한 송나라로 도망쳤다. 결국 오사와 오상은 죽임당했으며, 오자서는 초나라에 복수를 결심했다. 오자서는 송나라에서 화씨의 난이 발생하여 정나라로 도망쳤고, 정나라에서는 진 경공과 꾸민 음모가 들통 나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오나라로 도망쳤다.

오왕 협려는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06년, 드디어 모사 오자서, 장군 손무와 함께 초나라를 모두 다섯 번 공격하여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하고 합려는 패자가 되었다. 초나라를 떠나면서 복수를 다짐했던 오자서는 아버지와 형을 죽음으로 내몬 초 평왕의 시신에 채찍질을 하여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패자가 된 오왕 협려는 기원전 496년 오나라의 동쪽에서 점점 강국으로 성장하던 월나라 공격을 감행했다. 이전에 오왕 협려가 초나라 원정으로 나라를 비운 틈을 타 월나라가 침입한 것을 보고, 더 이상 월나라의 성장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월나라의 왕권 교체기를 이용하여 공격했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부상을 입은 채 귀국했다. 결국 오왕 합려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고, 아들 부차에게 자신을 죽인 것은 월나라 왕임을 잊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오왕 부차는 복수를 결심하고, 혹여 그것을 잊을까 두려워 섶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고 한다.

한편 월나라의 득세는 초나라의 `월을 도와 오를 제압한다`라는 후원 정책이 바탕이 되었다. 기원전 496년,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왕 합려에게 부상을 입힌 사람은 2대 왕 구천이었다. 월왕 구천은 오왕 합려와의 전쟁에 `자살부대`를 투입해 승리로 이끌었다. 죄인들로 구성된 자살부대원들이 진영 앞에서 스스로 목을 찔렀고 이에 당황하는 오나라 군대를 급급했던 것이다.

기원전 494년, 드디어 와신한 오왕 부차는 월나라를 공격하여 부초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월왕 구천은 5천여 명의 군사와 함께 회계로 물러났지만, 오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해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에 월왕 구천은 재상 범려의 말에 따라 매우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청했다. 즉 자신은 오왕의 신화가 되고, 자신의 부인은 오왕의 첩으로 바치겠다는 것이엇다. 월왕 구천의 제안에오자서는 극구 반대했지만, 북쪽으로의 영토 확장을 꿈꾸던 오왕 부차는 이를 받아들였다.

강화 체결 후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의 말을 끌어주는 등 3년 동안 오왕 부차의 종처럼 생활했다. 기원전 491년에야 월나라로 돌아온 월왕 구천은 상담하는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와왕 부차에게 받은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쓸개를 매달아 식사 전에 먼저 쓸개의 맛을 보았다. 더불어 월나라의 국력을 키우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고, 부인에게는 짖접 베를 짜도록 하고, 과세를 줄여 백성이 생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더불어 오왕 부차에게는 미녀 서시를 보내 정사에 소홀해지도록 하고, 고소대 또한 해마다 조공을 받쳐 월나라에 대한 경계를 늦추도록 했다.

한편 오왕 부차는 강화를 맺은 후 월나라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북쪽의 제나라를 공격하고자했다. 이에 오자서는 월나라를 존속시킨다는 후환을 남긴 채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으니 제나라 공격을 미룰 것을 진언했다. 오자서의 조언을 무시하고 출전한 오왕 부차는 제나라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고 다시 한 번 제나라를 공격하자고 했다. 여기에 오자서가 다시 반대 의견을 내자, 오왕 부차는 오자서를 제나라로 보낸후 자결을 명령했다. 오자서는 목숨을 끊으며 자신의 무덤가에 가래나무를 심어 그것으로 오왕 부차의 관을 만들고, 자신의 눈을 빼내 오나라 동쪽 관문에 걸어 오나라 멸망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기원전 482년, 제나라를 정복한 오왕 부차는 진나라, 노나라 등의 제후국을 불러 회맹하기 위해 송나라 땅 황지로 향했다. 이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월왕 구천이 군사 5만을 이끌고 오왕 부차의 귀로를 차단하고, 오나라 수도를 공격했다. 월왕 구천은 이내 오나라 수도 오를 함락한 뒤 태자를 죽였다. 이 소식이 황지에 있던 오왕 부차에게 바로 전달되자, 오왕 부차는 화의를 신청했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 주력 부대가 복귀할 경우 싸워 이긴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강화를 받아들여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4년 후, 오나라의 국력이 급격히 쇠퇴한 것을 간파한 월왕 구천은 다시 군대를 동원해 오나라를 공격했다. 기원전 473년, 드디어 양산에서 오왕 부차를 포위했다. 그는 오왕 부차를 불쌍히 여겨 항복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범려가 회계의 일을 상기시키며 반대했다. 이에 오왕 부차는 자결을 결심하고, 과거 오자서의 조언을 무시한 것을 한탄하며 칼을 들었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월왕 구천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서지에서 제, 진, 송, 노나라를 불러 회맹를 열고 춘추 시대 마지막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월왕 구천이 다시 패권의 자리를 초나라에게 내주자, 초와 진이 각축을 벌이고, 제, 진 등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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