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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마읍(馬邑) 전투

 기원전 135년. 한 무제는 흉노의 화친 제안을 놓고 중신들을 불러 어전 회의를 열었다. 그러자 강경파 왕회는 흉노와의 화친을 버리고 공격할 것을 주장했고, 화친과 한안국은 수천 리를 행군해야 한다는 원정의 불리함의 이유로 화친을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중신 대다수가 화친을 주장하자 한 무제는 어쩔 수 없이 그 의견을 따랐다. 그런데 기원전 133년,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을 대 화친파들이 2년 전과 같은 이유로 원정을 반대하자 왕회는 한 가지 계책을 냈다.

 그 계책은 유인책이었다. 흉노의 군신선우가 물자가 풍부하고 비옥한 마읍 땅을 노리고 있음을 이용하여 흉노를 끌어들이자고 진언한 것이다. 왕회는 흉노와 교역을 하던 마읍의 호족 섭일을 거짓 투항하게 한 후 흉노가 군사를 이끌고 마읍에 도착했을 때 미리 매복시킨 한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한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무렵 중앙 집권 체제를 완성한 한 무제는 지금까지 흉노와의 굴욕적인 화친 관계를 청산하고, 젖극적 강경책으로의 전환을 희망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한나라가 흉노에 정면으로 맞서기는 무리였기 때문에 한 무제는 왕회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기원전 133년, 섭일은 한나라의 밀명을 받고 흉노의 군신선우를 찾았다. 그는 "마읍 관리들의 목을 베고 성문을 열면 선우께서는 마읍의 주인이 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군신선우는 섭일을 믿을 만한 자로 여기고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곧 마읍의 성벽에 섭일이 말한대로 목이 걸린 것을 확인한 군신선우는 10만 기병을 이끌고 마읍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이것은 한나라의 유인책으로, 섭일이 마읍 성벽에 단 목은 모두 죄수들의 목이었으며, 이미 한나라의 30만 병력이 마읍에 매복한 상태였다.

 당시 흉노를 이끈 군신선우는 흉노의 영웅이자 건국자인 묵특선우의 손자로, 즉위한 뒤 한나라와의 평화조약을 파기했다. 그리고 한나라의 북변을 자주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고, 한나라로부터 공납을 받았다. 이렇듯 전투 경험이 많고 위세가 대단한 군신선우는 마읍으로 진격하던 중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초원에 소, 말, 양떼들이 많은 반면 인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군신선우는 인근 봉화대를 급습하여 생포한 병사를 문초한 끝에 한나라가 매복해 있음을 알아내고 즉시 회군을 명령했다.

 마읍 전투는 한나라가 야심차게 준비한 흉노 공격이었지만, 사실상 전투 한 번 없이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나라와 흉노간 화친 관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마읍 전투를 계기로 흉노는 한나라 북변을 더욱 자주 침범하였고, 한 무제는 흉노 정벌의 의지르 다지게 되었다. 

 한나라의 흉노의 대한 화친 정책이 적극적인 신세공격으로 전환된 것은 기원전 129년부터였다. 한 무제는 위청, 공손오, 공손하, 이광 등 네 명의 장군에게 각각 1만의 군사를 주어 흉노를 정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한나라의 1차 흉노 원정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공손오는 흉노에게 패해 7천 기를 잃었으며, 이광 자신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고, 공손하는 흉노를 만나지도 못한 채 돌아왔다. 오직 위청만이 승전을 알렸지만, 그도 겨우 포로 700여 명을 잡아 오는 것에 그쳤다. 

 위청은 한 무제의 총희인 위황후의 동생으로, 한나라 초기에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보였다. 그는 거기장군으로 임명되어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총 7차례 흉노 원정에 나섰으며, 기원전 129년 첫 번째 원정과 그다음 해의 두 번째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127년, 흉노가 어양 지역을 침입하여 약탈하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자 그는 세 번째로 출정했다. 그는 흉노 수천을 포로로 잡고, 소와 양을 많이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진나라 때 흉노에게 빼앗겼던 오르도스 지역을 수복했다. 기원전 124년, 대장군이 된 위청은 그 이후에도 수차례 출정하여 흉노 주력 부대를 막북으로 후퇴 시켰다.

 한편 위청과 더불어 흉노와의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곽거병이다. 그는 위청의 생질로, 주로 서쪽의 흉노를 토벌했다. 20세기에 표기장군으로 임명된 뒤 기원전 121년에 세 차례 흉노 원정에 나서 모두 승리했다. 처음에 그는 농서 지역으로 출정해 그 일대의 흉노에게 타격을 주었고, 같은 해 여름 두 번째 출정에서는 거연택을 넘어 기련산을 공격했다. 뒤이은 세 번째 출정에서는 하서 지역을 차지했다. 이때 흉노의 서쪽을 맡고 있던 혼야왕은 선우의 문책이 두려워 휴도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했다. 이후 하서 지역에는 무위, 주천, 장액, 돈황 등 4군이 설치되었고, 한나라는 이들 4군을 서역 진출의 기점으로 삼았다. 또한 기원전 119년에 곽거병은 위청과 공동으로 출병하였으며, 이들은 평성 부근에서 동서로 갈라져 위청은 서로군을, 곽거병은 동로군을 인솔했다. 여기서 곽거병은 흉노를 쫒아 바이칼 호까지 진격 하였고, 이로써 흉노는 남부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기원전 110년, 한 무제는 비로소 18만 군대를 이끌고 북부 변방의 전선을 순시했다. 심지어 그 와중 흉노의 사신을 보내 전쟁을 도발했다. 그러나 선우에게는 한나라 사신을 억류하는 정도로 대항할 힘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에 흉노는 치욕을 감수하고 바이칼 호로 이주했다. 이리하여 마읍 전투로 시작된 한나라와 흉노의 전쟁은 일단 한나라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한나라의 흉노의 대한 대외 정책은 한 무제가 즉위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한 무제는 문경지치의 태평성대를 통해 축적된 재정으로 대외 팽창 정책을 펼쳤으며, 우선 북방의 흉노를 제거하는 데 힘썼다. 다음으로 그는 흉노에게서 서역 지역의 지배권을 빼앗기 위해 전략을 구사했다. 이에 한 무제는 이광리, 이릉 같은 장수들을 흉노 전쟁에 출병시켰으나 번번히 패함으로써 승기를 완전히 잡지 못했다. 결국 한 무제는 기원전 89년에 이르러 흉노와의 전쟁을 포기했다. 

 한편 흉노는 수차례 한나라와 전쟁을 치르면서 인구 감소와 가축 손실을 겪었고, 이로 인해 내부에 균열이 생겼다. 결국 흉노는 한 무제가 사후 호한야선우, 도기선우, 거리선우,호갈선우, 오자선우 등 다섯 선우 사이에 권력 분쟁이 생겨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급기야 기원전 54년에 북흉노가 남흉노를 공격하기에 이르자, 남흉노의 호한야선우는 한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항복했다. 도한 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유럽에도 큰 영향을 미쳐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중앙 집권 체제와 경제력 회복, 풍부한 재정을 이룩한 한 무제는 흉노 정벌을 시작으로 대외 팽창 정책을 구사했다. 그러나 그의 대외 팽창용 침략 전쟁은 흉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나라의 주변국으로는 흉노 외에도 남쪽으로 남월, 동족으로 고조선, 서남쪽으로 전, 야랑 등이 있었다. 한 무제는 기원전 111년에 남월을 침략하여 9군을, 전과 야랑에는 7군을 설치했으며, 기원전 108년에는 고조선을 공략하여 4군을 설치함으로써 한나라의 위용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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