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부를 통일하고,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남부로 진격했다. 이에 유비 · 손권 연합군이 적벽에서 화공 작전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해 천하를 삼분하는 삼국시대가 열렸다.
당시 형주에 할거하고 있던 군웅은 유표 였는데, 그는 201년 조조에게 패하고 의탁할 곳을 찾던 유비를 받아 준 인물이었다. 유표는 유비에게 적은 수의 군사를 주어 신야에 주둔하게 했다. 신야는 비록 변두리 지역이었지만, 유비는 그곳에서 전략가 제갈량을 만나 삼고초려 끝에 곁에 두게 되었다. 유비의 삼고초려에 감동한 제갈량은 계책을 묻는 유비에게 "동쪽 오나라의 손권과 연합하고, 서쪽의 형주와 익주를 차지한 다음, 남쪽의 이월과 화친을 맺고 북쪽의 조조에게 대항해야 한다."라는 융중대책(隆中對策)을 일러주었다.
한편 강동 지역에서 손씨 일가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손씨 정권은 손책에의해 기반이 다져졌는데, 그는 황건적 토벌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유표와 싸우다 전사한 손견의 장남이었다. 손책은 양주 토벌을 시작으로 강동을 평정한 후 조조가 원소와 관도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 허창을 공격하려 했으나, 그만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아우 손권이 뒤를 이었다.
208년, 조조는 남하를 명령했다. 조조 대군의 목표는 형주의 유표였다. 그러나 조조가 형주에 도착했을 때 유표는 이미 병사한 뒤였으며, 그의 아들 유종이 뒤를 잇고 있었다. 유약한 인물이었던 유종은 조조 대군이 형주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바로 조조에게 투항했다.
한편 번성에 주둔해 있던 유비는 유종이 투항하자 유종과 조조 군대에게 협공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유비는 강릉으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대량의 군량미를 비축해둔 곳이었다. 조조는 양양에 도착한 뒤 유비의 강릉 후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유비가 강릉에서 대량의 군량미를 확보할 것을 우려한 조조는 직접 기병 5천을 이끌고 추격했다. 조조군의 추격은 맹렬하여 마침내 당양 장판파에서 유비를 따라잡았다. 유비의 군대는 제각각 갈라졌지만, 장비가 조조 군대를 상대로 싸우는 동안 유비는 하구로 피신할수 있었다. 이곳에서 유표의 장남 유기의 군대와 합류하니, 그 수가 약 2만 정도 되었다.
조조 군대가 추격을 멈추지 않고 하구에 도달하자, 다급해진 유비는 제갈량의 제안에 따라 손권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조조의 남하를 주시하고 있던 손권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노숙을 파견해 대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유비를 만난 노숙은 번구까지 후퇴하여 손권의 군과 연합할 것을 제안했으며, 이에 따라 유비는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냈다. 시상에서 손권을 만난 제갈량은 형주를 점령한 조조의 다음 행로가 강동이 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조조에게 대항할 마음이 있다면 유비 군대와 연합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지금이 조조에게 투항할 적기라며 자극했다. 더불어 조조 군대는 오랜 행군으로 지쳐 있으며, 조조의 군사들이 북방 출신이기 때문에 수전에 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주의 백성들도 조조를 따르지 않을 것임을 상세히 설명하여 승리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결국 손권은 유비와 연합하기로 결정했다.
손권은 주유를 도독으로 임명하고, 정보와 노숙에게 그를 보좌하게했다. 그리고 수군 3만을 주어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 군대와 싸우도록 했다. 그리하여 손권-유비 연합군과 조조의 선발군은 적벽부근에 진을 쳤다. 이때 손권-유비 연합군은 강의 남쪽에 주둔했으며, 조조 군대는 강의 북쪽에 주둔했다.
조조의 병력은 연합군의 비해 월등했지만, 제갈량의 예상대로 조조의 군사들은 장거리 행군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남방의 습한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유행병에 걸렸으며, 뱃멀미까지 그들을 괴롭혔다. 조조 군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크고 작은 군선들을 십여 척씩 쇠고리와 사슬로 연결한 다음 넓은 나무판을 갈아 걸어 다닐 수 있게 했다. 이것이 연환선으로, 그제야 병사들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 연환선은 조조 군사들의 뱃멀미를 해결해 주었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진퇴가 자유롭지 못했다. 이점을 정확히 파악한 사람이 주유의 부하 황개였다.
황개는 화공, 즉 불로 공격할 것을 제안하며, 자신이 배를 이끌고 거짓 투항한 다음 불을 놓겠다고 했다. 주유가 이를 받아들였고, 황개는 군사들을 시켜 열 척의 배에 마른 섶과 갈대를 싣고 기름을 부은 후 가리개로 덮어놓게 했다. 또한 큰 배 뒤에 작은 배들을 매어 놓아 불을 놓은 후에 옮겨 탈 수 있도록 했다. 다음으로 황개는 조조에게 거짓으로 투항하는 서한을 보냈다. 황개는 서한에 비록 손씨의 은혜를 많이 받기는 했으나 천하의 대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강동의 힘이 미흡하며, 이를 동오의 장수 들은 다 알고 있으나 오직 주유와 노숙만이 모를 뿐이므로, 자신은 이를 헤아려 조조에게 의탁하려는 것이라며 투항 이유를 밝혂다.
조조군 진영에 동오의 장수 황개가 항복하러 온다는 소식이 퍼졌다. 조조의 군사들이 배 위로 올라와 구경하니,소문처럼 황개가 탄 큰 배 뒤에 작은 배들이 뒤따르는 형태로 수군영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수군영에 거의 다다랐을 때 동오의 배에서 갑자기 불길이 솟아올랐다. 11월 이었음에도 세찬 동남풍이 불어오니, 동오의 불은 삽시간에 조조 수군의 배로 번지기 시작했다. 조조 수군의 배들은 모두 연환선이었기 때문에 타는 불길은 마치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조조의 군사들은 불길에 타죽거나 불길을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불을 지르고 작은 배에 옮겨 탄 황개의 군사들은 연안의 조조 군대를 향해 불화살을 쏘았다. 그리하여 조조의 진영은 조조의 진영은 그야말로 불바다가 되었다.
이어서 주유와 명에 따라 연합군 주력 부대가 조조 군대를 맹공격하니, 조조 군사 중 살아남은 자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조조도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화용으로 향하는 소로를 택해 도망쳤다. 그러나 그는 유비와 주유의 추격이 남군까지 계속되자 조인, 서황, 악진 같은 부하 장수들에게 강릉과 양양의 수비를 맡긴 채 허도로 도망했다. 적벽 싸움에서 대패한 조조는 남쪽 지방에 대한 공략을 중단했다.
이 싸움을 계기로 조조의 세력은 위축되고 유비와 손권의 세력이 확장되었다. 결국 3자는 천하를 삼분하여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가 삼국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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