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9년, 지금의 안휘성 숙주에 있는 대택향에서 변방을 지키는 수졸의 둔장 진승이 농민 출신 수졸 수백 명을 모아놓고 진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진승은 하남성 양성의 미천한 농민 출신으로, 가난하여 남의 땅을 경작하며 살았다. 그는 농민들에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어양에 도착해야 할 기한을 이미 넘겼소. 그리고 우리가 어양에 무사히 도착한다 해도 참수를 피할 방법은 없소이다."
당시 진나라에는 기한을 넘긴 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참형에 처하는 법령이 존재했고, 진승 무리는 대택향에서 홍수를 만나 더 이상 앞으로 나갈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사 다행히 참수를 면해 부역에 종사해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고, 부역에 차출되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을 보지 못했을 것이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뜻을 이루고죽는 것이 낫지 않겠소. 어찌 왕후와 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으며,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일 분이오!"
이와 같은 설득에 많은 농민이 호흥하니, 진승 무리의 위세는 등등했다.
이처럼 시작된 진승의 봉기는 진승이 대초의 장군, 반란 동지 오광이 도위를 자처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 게다가 장이, 진여, 무신, 주문 등의 반진 명사들까지 무리에 가담하자 엄연한 반진 군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내 진승의 봉기군은 초나라 말기의 도읍지였던 진성을 잠령하고, 급기야 진승은 장초를 건국하고 왕을 칭했다. 다음으로 진승은 오광을 가왕으로 임명하고, 진나라 군을 공격했다. 오광이 주문과 함께 진나라 타도를 위해 함양으로 진군하니, 이때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이 고조된 백성이 동조하여 봉기군은 수십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진승의 봉기는 세력 분열로 고작 6개월 만에 실패로 끝났다. 진승은 여러 갈래로 진격을 명하고, 이에 오광은 형양으로, 주문은 함곡간으로, 무신, 장이, 진여 등은 북쪽의 조나라로 향했다. 그러나 오광은 부장이었던 전장에게 살해되고, 주문은 미숙한 전술로패했으며, 조나라를 평정한 무신, 장이, 진여는 서쪽으로 진격하라는 진승의 명령을 어기고 그대로 조나라의 왕, 승상, 대장군이 되었다. 진승이 연나라를 평정하고자 파견한 한광마저 연나라의 왕이 되면서 봉기군의 세력은 약화, 분열되었다.
반면 진 2세 황제(재위 기원전 209~기원전 207)는 진승의 봉기군이 함곡관을 넘어 함양 부근까지 파죽지세로 진군하자 장수 장한을 파견했다. 그는 군대르 조직할 여유가 없었지만 여산릉 부역자들을 사면하는 방법으로 수십만 명의 병졸을 모집했고, 봉기 전에는 농민에 불과했던 봉기군을 격파해 나갔다. 승세를 잡은 장한은 진승이 있는 진성으로 진격했다. 진승은 대군을 이끌고 진성을 방어했지만, 끝내 장한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성보로 퇴각했다. 진승은 그곳에서 오광과 마찬가지로 배신자 장가에게 목숨을 잃었다. 기원전 208년, 마침내 진나라는 농민 반란군을 완전히 진압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으로 기록되는 `진승의 난`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당시 빈농 진승과 오광이 규합한 반진 무리가 삽시간에 봉기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2세황제의 실정 때문이었다. 기원전 210년, 순행 도중사구에서 병사한 진 시황은 첫째 아들 부소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공모하여 진 시황의 조서를 위조하였고, 결국 부소는 불효의 죄를 뒤집어 쓰고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하여 막내아들 호해가 황위를 이어 2세황제가 되었지만, 그는 황제의 자질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2세황제는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는 조고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방탕하게 생활했다. 또한 진 시황이 생전에 착수한 만리장성 축소, 여산릉, 아방궁 건설 등의 대토목공사를 계승했다. 불과 10여 년에 걸쳐 진행된 이러한 대토목공사들의 건축 비용과 노동력이 모두 백성의 세금과 노동력으로 이루어졌음은 물론이었다. 또한 그는 북방의 흉노 정벌을 이유로 백성을 무자비하게 징발했다. 이 모든 것들이 백성에게는 생사의 문제였다. 진나라의 가혹한 법제 역시 백성이 등을 돌린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진승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백성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라는 심정으로 봉기군에 적극 가담했다.
장한의 활약으로 2세황제는 6개월 만에 진승의 난을 진압했다. 하지만 진승의 난은 반진의 불씨가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는 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이 중 가장 강한 농민 반란군은 항우와 유방이 일으켰다.
진승의 봉기가 일어난 그해에 전국 시대 초나라의 귀족 출신 항량이 조카 항우와 함께 회계 태수 은통을 죽이고 오중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항량과 항우의 봉기군은 약 8천 명이었으며, 이들은 진승의 봉기군이 진의 장한에게 대패하자 장한의 후방을 공격했다. 이때 진영과 영포, 포장군 등이 합세하였고, 항량의 봉기군은 크게 늘어나 대군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진승이 측근에게 살해되고 진가가 무리를 이끌자, 항량은 그를 죽이고 진승의 무리를 흡수했다.
순식간에 반진 세력의 수장이 된 항량은 대책을 마련하던 중 전략가 범증의 건의에따라 초 회왕의 손자인 양치기 웅심을 그의 조부와 같은 이름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항량은 진과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를 거두다 그만 자만하였고, 불행하게도 정도에서 진의 장한에게 죽임을 당했다.
진의 장한은 이어서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하고, 거룩을 포위했다. 이에 조나라 왕 조헐이 구원을 요청하자 초 회왕은 송의를 상장군, 항우를 차장, 범증을 말장으로 삼아 조나라 구원을 명했다. 이는 항우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인사 조치였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항량의 뒤를 이어 상장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전략에 있어 송의와 심하게 대립하자, 항우는 초 회왕의 명령이라고 날조하여 송의를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장군이 되어 거록의 포위를 풀어 주었고, 진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여 진나라 장군 왕리를 생포하고, 소각과 섭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장한을 퇴각시켰다. 이로써 거록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항우는 명실 공히 반란군의 수장이 되었다.
한편 유방은 진승이 봉기를 일으킨 지 2개월이 지난 후에 강소성 패현에서 봉기했다. 그는 원래 진 시황의 여산릉 공사에 투입되는 인부들을 관리하는 책임자였으나 도망자가 속출하자 그들을 풀어 주고 자신도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패현의 현령이 백성에 의해 죽임당하고, 문서 담당 하급 관리 소하와 옥리 조참 등이 그를 패공으로 추대하자, 이를 받아들임으로써진나라에 항거했다. 유방의 봉기군은 금세 그 수가 늘어 2, 3천 명이 되었으며, 그 일대에서 점차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역량의 부족함을 느낀 유방은 기원전 208년에 항량과 연합을 이루었으며, 항량 사후에는 초 회왕의 명령에 따라 함양 공격에 나섰다.
이리하여 반진 세력의 양대 세력으로 성장한 항우와 유방은 초 회왕의 `함양을 먼저 함락시킨 사람을 진의 본거지인 관중의 왕으로 삼는다`라는 약속의 주인공, 즉 천하의 새 주인이 되고자 경쟁한다.
농민 출신 진승은 진나라를 직접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올린 반란의 기치는 불씨가 되어 각지의 반진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기원전 206년, 마침내 진나라의 3세황제 자영이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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