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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호람(胡藍)의 옥(獄)

1368년, 원의 순제를 몽골 본토로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왕조를 건국한 명나라 홍무제(洪武帝)는 황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대대적인 개국 공신 숙청을 감행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좌승상 호유용(胡惟庸)과 개국 공신 남옥(藍玉)을 숙청한 `호람의 옥`이다. 이 사건의 연루되어 죽은 자는 각각 3만여 명과 2만여 명이었다. 이로써 홍무제는 승상 제도를 폐지하고 황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명나아 개국과 함께 이루어진 논공행상에서 이선장(李善長), 등유, 상무, 탕화, 유기, 왕광양 등이 공후장상에 책봉되었다. 또한 원나라의 행정 제도를 그대로 따라 중앙에 좌우승상이 수장인 중서성을 두고 황제 보좌와 관료 통솔을 맡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내외 정세가 안정을 되찾자 홍무제는 개국 공신의 권력에 부담을 느꼈으며, 승상에게 집중된 권한 역시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홍무제의공신들에 대한 의심이 날로 증폭되면서 숙청의 칼날이 공신들을 향했다. 

명나라 초대 상승은 이선장이었으며, 이후 양광양이 그 뒤를 이었다. 왕광양이 주살된 후에는 호유용이 좌승상이 되었다. 호유용은 안휘성 정원 출신으로 1355년에 주원장의 군대에 가담해 주부, 지현, 통판 등의 관직에 올랐으며, 1370년에는 중서성 참지정사가 된 인물이다. 1373년,우승상을 거쳐 좌승상이 된 그는 홍무제의 총애를 믿고 전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관리들의 생사 여탈권을 손에 쥐고 관직의 승격과 좌천의 임의대로 결정했다. 심지어 각 주현에서 올라오는 상소문 중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있을 경우에는 절대 홍무제에게 상주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의 주변에 관직을 얻으려는 자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레 당파가 형성되었다. 게다가 민간 상인들마저 호유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자 호유용의 세력은 황제의 권력과 맞먹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홍무제는 호유용 세력의 성장을 좌시하지 않았다. 초기에 홍무제는 호유용을 신임하여 중용했으나, 서달과 유기 등의 대신들이 호유용의 전횡을 고하자 호유용을 벌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마침 호유용의 아들이 마차 사고로 목숨을 잃고, 호유용이 잘못이 없는 마부를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홍무제가 호유용의 잘못을 따져 묻자 호유용은 금전으로 죄를 면하고자 했다. 홍무제는 크게 화를 내며 그에게 목숨으로 죗값을 치를 것을 요구했다. 이쯤 되자 홍무제의 신임을 잃고 목숨마저 위태롭다고 생각한 호유용은 결국 어사대부 진녕, 어사중승 도절 등의 측근들과 모반 계획을 짜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호유용의 역모는 도절의 고발로 성사되지 못했다. 1380년, 홍무제는 호유용에게 모반죄를 적용해 체포하여 심문했다. 이를 통해 그간 호유용의 전횡은 물론이고, 북원과 일본까지 사신을 보내 역모에 지원를 요청했음을 알아냈다. 홍무제는 호유용과 진녕, 도절 등 역모 가담자는 물론, 그 가족들까지 모두 1만 5천여 명을 참했다. 

호유용의 사건을 계기로 홍무제는 행정 제도를 개혁했다. 1376년에 이미 행중서성을 폐지하고 정사사, 제형안찰사사, 도지휘사사 등을 설치해 지방의 민, 형, 병권을 나누었던 홍무제는 이번에는 아예 중앙의 중서성을 폐지하고, 그 휘하의 육부(이, 호, 예, 병, 형 공)를 황제에게 직속시켰다. 또한 군사 제도를 개편해 원나라 때의 대도독부를 폐지하고 5군 도독부를 두고 통수권 역시 황제에 직속시켰다. 이로써 진한 시대 이래 약 1,600여 년간 시행되어 온 승상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개인의 사사로운 군대 양성은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그야말로 절대 권력의 황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호유용 사건이 있은 지 10년 뒤인 1390년에 홍무제는 다시 한 번 옥사를 일으켰다. 홍무제는 유호용의 역모에 이선장이 관련 있다는 밀고를 바탕으로 이선장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선장은 명나라 초대 승상이었던 인물로, 호유용을 천거한 장본인이자 호유용의 형의 딸을 그의 조카에게 시집보냄으로써 호유용과 인척관계를 맺은 사이이기도 했다. 이선장은 호유용의 역모 계획을 알고 있었으나 가담하지 않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본인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까지 모두 죽임당한 것이다. 여기에 육중형, 비취, 당승종, 조용 등도 연좌되어 참형을 당했으며, 모두 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홍무제가 호유용 사건으로 황제에게 위협이 될 만한 개국 공신들을 대거 숙청한 것은 태자 주표에게 안정된 정권을 물려주는 의도가 포함된 것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태자 주표가 1392년에 세상을 뜨고, 어린 황태손 주윤문이 황위를 잇는 상황이 되자 공신들의 대한 홍무제의 불안은 도육 커졌다. 

1393년, 홍무제는 어린 황태손의 장래의 위협 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는 남옥을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남옥 역시 안휘 정원 출신으로, 명장 삼우춘의 처남이었다. 그는 명나라 건국의 일등 공신 서달을 따라 북정에 나서 수차례 큰 공을 세웠으며, 1378년에 영창후가 되었고, 1387년에는 북원 평정에 나서 공을 세움으로써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남옥은 북원과의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양국공에 봉해졌다. 그런데 남옥은 장군으로서는 용맹하고 담력이 뛰어났으나, 성질이 조급하고 난폭한면이 있어 자신의 공을 자화자찬하는 것이 심했고 불법 행위를 종종 일삼았다. 이에 홍무제는 남옥의 행실을 크게 꾸짖었지만, 남옥은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연왕 주체가 남옥을 겨냥해 방자함이 극에 달한 공후들을 제거할 필요성을 주장하자, 홍무제의 남옥에 대한 숙청의지는 더욱 커졌다.

1393년, 금의위 지휘자 장얼이 남옥의 역모를 고발했다. 홍무제는 즉시 남옥의 체포와 조사를 명했다. 남옥의 죄는 경천후 조진, 학경후 장익, 축로후 주수, 첨휘 등과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었으나 모반의 증거는 불충분했다. 그러나 홍무제는 남옥을 참수하고 삼족을 멸했다. 더불어 남옥과 관련된 자들과 그 가족까지 모드 1만 5천여 명을 숙청했다.

호유용과 남옥 사건 이후에도 홍무제의 공신 숙청은 계속되었는데, 주덕홍, 부우덕, 요영충, 주량조 등의 공신 역시 사약을 받거나 참수당했다. 이로써 명나라의 개국 공신 중 살아남은 자는 탕화와 경중문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탕화는 홍무제와 동향 출신으로 홍무제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또한 명나라 건국 후에는 일찌감치 권력을 내려놓고 귀향하여 공신 숙청의 칼을 피할 수 있었다. 

 명나라 개국 공신에는 남은 자가 없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숙청의 바람이 거세고, 남아 있는 조정 관료들역시 숙청 대상이 될가 하느 두려움에 휩싸였다. 조정의 평화가 손상될 것을 걱정한 황태손 주윤문이 우려를 표명하자, 홍무제는 다음 날 황태손에게 가시가 돋친 나무를 주며 한손으로 쥐어 볼 것을 명했다. 이대 황태손이 즉각 잡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홍무제는 "내 손으로 가시를 다 뽑아 주면 너는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공신 숙청의 이유를 설명했다.

홍무제의 개국 공신 숙청 작업은 황태손이 황위를 이었을 때를 대비해 잠재적인 위협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함도 있겠으나, 이보다 더 큰 의의는 황권을 강화하는 제도의 마련, 즉 승상 제도의 폐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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