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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비수대전 (淝水大戰)

 "동진의 사마요를 장안에 데려와 상서좌복야로 삼고, 재상 사안은 이부상서, 장군 환충은 시중으로 삼겠다."

 383년 7월, 전진의 부견이 동진 공격을 선언했을 때, 부견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고, 선비족 모용수와 강족인 요장이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전진 조정에는 동진 정벌을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았다. 

한족 줄신 재상 왕맹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으니, 동진이 중원 아래 강남에 위치하고 있지만 정통 제위를 승계하고 있으며, 군신 관계가 정립되어 있으니 감히 정벌하지 말고, 우선으로 선비족과 강족을 정비할 것을 충언했다. 또한 부견이 가장 신임하던 동생 부융 역시 선비족, 갈족, 강족 등으로 후방이 어지러운 가운데 원정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 외에도 부견의 아들 중산공 선과 명승 도안이 반대했지만, 부견은 동진 정벌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전진은 351년에 저족 출신 부씨가 수립한 정권으로, 부건이 장안을 수도로 정하고 국호를 진이라 칭함으로써 건국되었다. 355년, 부건이 죽으면서 그의 아들 부생이 권좌를 계승했으나 폭정을 일삼아 사촌 동생 부견에게 살해되었다. 황제가 된 부견은 부족과 상관없이 선비족, 갈족, 강족, 흉노의 인재를 등영했는데, 특히 한족 왕맹은 재상으로 삼아관료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제를 강화했다. 또한 학교를 건립해 인재를 양성하고, 치수에 힘써 농업을 발전시켰으며, 부족 간의 갈등을 최소화해 단결을 이끌어 냈다. 그리하여 그는 370년에는 전연, 376년에는 전량을 멸망시키고, 탁발족을 굴복시킴으로써 북방을 통일했다. 북방 통일을 이룩한 부견에게 남은 것은 천하 통일이었으며, 결국 그는 동진 정벌을 결심했다. 북방 통일을 이루어 낸 자신감과 이민족은 통일 국기를 건국할 수 없다는 열등감이 부견의 의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383년, 마침내 부견은 보병 60만, 기병 27만, 금위군 3만 등 총 90만 명을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했다. 그는 90만 대군을 삼분하여 선봉장 부융을 먼저 출병시키고, 요장은 동쪽으로 남하하게 했으며, 자신은 모용수와 함께 수양성으로 진격하는 수륙양면 작전을 펼쳤다. 당시 부견은 "전진 군사들의 말채찍만을 모아 강물에 던지면 강물의 흐름도 막을 수 있다."라고 말하며 수적 우세를 자랑했다. 실제로 부견의 군대는 90만에 이르는 대군 이었으나, 다수 이민족들로 급하게 조직되어 군 정비가 완벽하게 이루어져있지 않았다.

 반면 당시 동진은 황제 사마요가 어렸기 때문에 재상 사안의 보좌를 받고 있었다. 명문가 출신이었던 사안은 은둔과 풍류 생활을 즐기다가 뒤늦게 조정에 입문했는데, 환온이 동진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대권을 독점한 뒤 찬탈을 시도하자 이를 저지했다. 이후 사안은 재상이 되어 사씨 일족의 권세가 과도하게 강성해지는 것을 막고, 몰락 귀족들을 적절히 중용함으로써 정국을 안정시켰다. 또한 조카 사현에게 북방 유랑민들을 훈련시켜 북부군을 조직하게 했다. 

 전진이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오자 전권을 위임받은 사안은 동생 사석을 정벌군 대도독으로, 사현을 선봉장에 임명하여 전진의 공격을 막도록 했다. 또한 환충을 강주자사로 임명하여 장강 중류에서 전진의 남하를 저지하도록 했으며, 호빈에게는 군사 5천을 주어 수양성 방어 지원에 나서도록했다. 이리하여 동진의 8만 병력 배치가 완료되었다.

 10월, 전진의 부융이 회수를 건너 수양성을 공격하여 동진의 평로장군 서원희를 생포했고, 모용수는 운성을 함락했다. 수양성이 함락되자 수양성이 방어 지원에 나섰던 동진의 호빈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협석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이에 부융은 곧 협석으로 진군했다. 또한 부융은 부하 양성에게 군사 5만을 주며 낙간에 주둔하여 회수의 물길을 끊어 동진의 호빈을 고립시키도록 했다. 이때 고립된 호빈이 낙간의 동쪽의 주둔하고 있던 사현과 사석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밀서를 보냈지만, 도중에 밀서가 부융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곧 부융은 부견에게 군대를 이동시켜 호빈을 공격할 것을 건의했으며, 부견은 군대 대부분을 항성에 남겨둔 채 8천 기병과 함께 수양으로 와 부융과 합류했다. 

 한편 부견은 동진을 공격함과 동시에 항복을 권유하기도 했다. 이때 부견이 사신으로 파견한 자가 주서였다. 주서는 원래 동진 출신으로, 양양의 수비를 맡다 전진에 패한 뒤 포로가 되어 부견의 사람이 된 인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주서는 전진을 배신하고 사현과 사석에게 90만 대군이 모두 모이지 않은 전진의 군대 상황을 알려 주었다. 또한 모두 집결하기 전에 공격할 것을 건의하며, 심지어 자신도 내응할 것을 약속했다. 

 11월, 사현은 유뢰지에게 북부군 1만 5천여 명을 내어 주며 전진에 대한 기습 공격을 명했다. 이에 유뢰지는 군사를 나누어 전진의 퇴로를 막은 다음, 회수를 건너 맹공격을 가했다. 동진의 기습에 놀란 전진군은 대부분 도망치다 회수에 빠져 죽었으며, 양성은 전사했고, 왕현은 포로가 되었다. 이어서 사현과 사석은 비수 동쪽에 진을 쳐 전진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전진의 군대는 비수 서쪽에 진을 쳤고, 동진의 군대는 비수 동쪽에 진을 쳤다. 겨우 8만의 군사가 전부였던 동진은 전진의 후속 군대가 도착하면 전세가 불리해질 것을 우려하여 한 가지 계책을 내었다. 사현은 전진에 사신을 보내 전했다.

 

 전진의 군대가 강 가까이에 진을 친 것은 지구전을 뜻하는 것으로 속전속결의 방법은 아닙니다. 만약 전진의 군대가 조금 후퇴하여 동진의 군이 강을 건너갈 수 있다면 속전속결로 승부를 가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멋있는 일이며, 양국에 이롭지 않겠소.

 

 전진의 장수들은 결단코 반대했으나 부견은 동진의 군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정예 부대로 불시에 습격한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며 동진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전진의 군대에 후퇴 명령이 내려지자, 원정으로 심신이 피로해진 병사들은 고향 생각이 간절했다. 게다가 한족 병사들은 자신들로 인해 동진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 주서가 후방에서진의 군사가 패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며 선동하니 전진 군데의 진용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반면 사현과 사염은 전진의 군대가 혼란에 빠지자 맹공격을 퍼부었다. 동진의 공격을 알아차린 부융은 전진군의 퇴각을 저지하고 진용을 정비하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낙마하여 동진 군사에게 죽임 당했다. 여기에 승세를 탄 동진 군대가 맹렬히 전진군을 쫓으니,전진군은 바람소리나 새 울음 소리조차 동진군의 추격 소리로 착각하는 등 두려움에 휩싸여 북으로 향했다. 부견 역시 어깨에 화살을 맞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화북으로 달아났다. 동진이 8만 대군로 전진의 90만 대군을 비수에서 물리친 이 전투는 비수대전으로 불리며, 중국 역사상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함께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군대를 물리친 3대 대전으로 기록된다.

 전진의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참패하자 그의 세력은 점점 약해졌고, 부견 아래서 숨죽이고 있던 이민족들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먼저 선비족 모용수가 부견을 떠났으며, 선비족 모용충은 무력으로 부견을 장안에서 내쫓았다. 마침내 385년에는 부견의 부하였던 강족 요장이 부견을 살해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이로써 화북은 다시 10개국이 할거하는 분열과 혼란의 시대에 접어들었으며, 중국은 회수를 경계로 남과 북이 대치하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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