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당쟁은 우승유(牛僧孺)와 이종민(李宗閔)을 영수로 하는 우당과 이덕유(李德裕)를 영수로 하는 이당 사이에서 벌어진 정치 투쟁으로, 우승유와 이덕유의 부친 이길보의 개인적 원한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진사 시험에 응시한 우승유와 이종민의 답안에서 비롯된 싸움은 점차 과거출신 관료와 귀족 사이의 싸움으로 전개되었다. 당쟁은 사실상 헌종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정식적인 붕당은 목종(재위 820~824) 때 형성되었다. 이후 우이 당쟁은 무려 40여 년간 지속되었다.
808년, 헌종(재위 805~820)은 조정에 직언을 서슴지 않는 인재 선발을 목적으로 제책 시험을 실시했다. 이때 우승유와 이종민은 시험지에 조정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으며, 시험관들은 이들이 선발 조건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헌종에게 추천했다. 그런데 당시 재상이었던 이길보는 이들이 비판한 조정의 문제점들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챘다. 게다가 귀족 출신 관료였던 이 길보는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된 사람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헌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우승유와 이종민의 단점을 나열하며, 이들의 진사과 합격은 시험관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고했다. 시험관들의 파면과 우승유 및 이종민의 불임용을 거듭 호소하자 헌종은 이 길보의 요구대로 시험관들을 파면시키고 우승유와 이종민을 선발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우승유가 부당함과 억울함을 피력했으며, 이 문제는 조정에서 공론화되었다. 사태가 커지자 헌종은 이길보를 회남 절도사로 좌천 시키고, 우승유와 이종민은 발탁하지 않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당시 우승유와 이길보의 관계가 악화로 치닫지는 않았지만, 여기에 원한을 품은 이길보의 아들 이덕유가 한림학사가 되면서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었다.
821년, 목종 재위 때 진사 시험은 이종민이 주관했다. 그런데 이 시험에서 이종민의 친척이 합격하자, 시험관이었던 전휘가 뇌물을 받고 이종민의 친척을 합격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에 이덕유가 이종민과 전휘를 청탁 혐의로 고발함으로써 이종민은 검주자사로 좌천되고, 전휘역시 강등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종민은 이덕유에게 원한을 가졌으며, 호부시랑 우승유와 유대를 형성했다.
이후 당 조정은 우승유와 이종민을 따르는 과거 출신 관료들의 우당, 이덕유와 결탁한 귀족 출신 관료들의 이당으로 극명하게 이루어졌다. 우당에는 우승유, 이종민, 이봉길 등의 있었으며, 이당에는 이덕유, 이신, 원진 등이 있었다. 우당의 이봉길이 득세하면서 조정은 우당이 차지했으며, 823년에 우승유가 재상이되자 이덕유는 지방으로 떠났다. 우당은 목종 사후 경종(재위 824~826) 때까지 실권을 놓치지 않았다.
우당의 권력은 문종(재위 826~840) 때에도 여전했다. 문종 즉위와 함께 환관이 된 이종민은 재상에 우승유를 추천했으며, 이에 829년 우승유는 다시 재상에 올랐다.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우당은 이덕유를 서천 절도사로 좌천시켰다. 그런데 831년 토번의 장군 실달모가 300여 명의 부하와 가족을 데리고 당나라에 투항하자 서천 절도사 이덕유는 이를 규합해 적은 군사로 유주를 수복할 수 있었다. 이어서 실달모가 토번을 서북쪽으로 몰아내는 일에 자원하자, 이덕유는 문종에게 이를 보고했다. 문종이 조정 대신들에게 의견을 묻자 대부분의 대신은 찬성 의사를 표했지만, 우승유만은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유주를 얻고 잃은 것은 나라에 큰 이익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토번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기보다 정전 약속을 지켜 신의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결국 문종은 이덕유에게 실달모를 토번으로 압송하고 유주를 토번에 돌려줄 것을 명령했다. 이덕유는 할 수 없이 명에 따랐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당의 반격은 문종의 뒤를 이은 무종(재위 840~846) 대 이루어졌다. 이덕유는 감군인 환관 양의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하여 양의의 추천으로 재상이 되었다. 이제는 우승유와 우당이 좌천될 시기가 된 것이다. 우승유는 태자소사로 좌천되었으며, 844년에는 번진과 연계가 있다는 죄명으로 남방으로 내쫓겼다. 이종민도 두 달이 안 되는 동안 세 번이나 파직당했다. 실권을 장악한 이덕유는 번진 문제를 해결하고, 무종에게 폐불을 건의했다. 무종은 불교보다 도술을 편애하여 도사 조귀진을 가까이 두고 승려들을 멀리했지만, 그럼에도 당시 불교의 부패는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승려의 수는 30만 명에 이르렀으며, 사찰이 소유한 토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입반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략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심지어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찰이 있는가 하면, 승려가 관리와 뒷거래로 조세를 착복하고, 음란한 행동을 하기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종은 842년, 이덕유의 건의를 받아들여 꼭 필요하지 않은 승려와 처첩을 거느리고 수행을 하지 않는 승려를 모두 환속시키라는 조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843년에는 궁궐 안에 있는 모든 불경과 불상의 파괴를 명했으며, 규모가 작은 사찰을 철거하고 작은 사찰 소유의 불상과 불경을 큰 사찰로 옮기도록 했다. 또한 무종은 불교 탄압 강도를 높여 845년에는 전국의 4,500여 개 사찰을 모두 허물고, 승려를 환속시켰으며, 사찰의 토지와 노예를 몰수했다. 이덕유와 이당은 무종의 폐불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세수 확대에 기여하는 등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846년, 무종이 사망하면서 이당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선종(재위 846~859)은 즉위한 뒤 무종 시대의 조정 대신들을 모두 몰아냈다. 재상 이덕유는 파직되어 형남 절도사가 되었고, 조정은 다시 우승유와 우당이 차지했다. 우당은 이당을 배척함과 동시에 이당이 추진했던 모든 정책을 반대로 돌려놓았다. 따라서 이덕유의 폐불 정책은 폐기되어 무종 때 철거되었던 사찰들이 다시 지어졌으며, 환속했던 승려들은 칙령에 따라서 다시 불교로 귀의하는 등 불교가 다시 흥성했다.
당 왕조 6대에 걸쳐 무려 40여 년간 이어진 우당과 이당의 권력 투쟁은 이덕유의 죽음으로 드디어 그 끝을 맺었다. 선종의 즉위와 동시에 좌천되었던 이덕유는 형남 절도사에 이어 조주사마를 전전하다가 다시 애주에서 사호참군으로 좌천되었고, 848년 그곳에서 숨울 거두었다. 이로써 이당이 와해되자 우이당쟁의 승리자는 우당이 되었다. 선종 이후 우이당쟁은 우당과 이당의 주요 인물들이 세상을 뜨면서 사그라졌다.
우이당쟁은 정치와 사회 발전을 위한 논쟁이 배제된, 단순히 권력 쟁취를 위한 관료 집단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당쟁의 피해는 오롯이 백성의 몫이었다. 또한 당 왕조의 존립을 위협하는 번진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개인적 원한과 복수에 초점을 맞춘 논쟁만 거듭함으로써 환관들에게 권력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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