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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육진(六鎭)의 난

 499년, 북위 개혁의 구심점이었던 제7대 효문제가 병사하자 북위 신질서에 잠재되어 있던 사회적 모순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효문제의 뒤를 이은 제8대 황제 선무제(재위 499~515)는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정사를 외척에 맡겼으며, 제9대 황제 효명제(재위 510~528)는 나이가 어려 모후인 호태후가 섭정했다. 호태후는 효명제 등극에 공을 세워 시중, 거문하성, 영군장군이 된 우출 등 귀족파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자신의 섭정에 불만을 품고 연금을 시도했던 유등과 원차를 내보냈다. 호태후는 섭정 동안 북위의 경제를 성장시키긴 했으나, 그녀는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또한 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녀는 전국에 사찰을 건립하여 재정을 악화시켰다. 더불어 문벌귀족들은 서로 부를 경쟁하듯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생활했다. 이런 북위의 황족과 문벌귀족들의 사치는 백성을 수탈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에는 균전제가 점차 무너져 권문세족들은 대토지 소유가 가능해졌고, 노비 예속을 통해 토지와 부를 더욱 증식해 나갔다. 또한 군의 크기에 따라 비단의 양을 공공연히 정해 관직을 매매했다. 이처럼 효문제사후 20, 30년간 북위 사회에서는 지배 계급 내부의 갈등과 충돌이 심해지고, 관료 사회는 부패 했으며, 피지배층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특히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부터 북위 군대의 불만은 점점 쌓였고, 이는 결국 봉기로 이어졌다. 

 북위 군대는 크게 중앙의 근위군과 북부 변방의 군진으로 구성 되었으며, 모두 탁발씨의 귀족들이 담당했다. 북위 초기에는 이들의 지위가 비교적 높았으며, 훈공에 따라 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 이들에게 주어진 특혜가 없어져 문관에 비해 승진이 불리했으며, 대우 역시 달라졌다. 결국 선비족 귀족의 자녀로 이루어진 우림의 근위군이 쌓인 불만을 터뜨리며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근위군보다 더 큰 불만을 가진 병사들이 있었으니 바로 변방의 군진 병사들이었다.

 북위는 초기에 북쪽 유연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군진을 여럿 두었으며, 그중 6개의 진이 중요했다. 이를 육진이라 일컬으며, 회삭진, 무천진, 무명진, 유현진, 옥야진, 회황진 등을 일컫는다. 육진 역시 중앙의 근위군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위상을 유지했으나 북위 말년에는 홀대를 받았으며,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육진의 선비족 장군들은 문벌에서 제외되어 승진에서 경시와 냉대를 받았으며, 육진 내에도 갈등이 존재했다. 육진 선비족 장군들 역시 병사들과 백성을 착취하여 사치스런 생활을 한 것이다. 또한 유연족의 침입이 계속되었고, 북위의 압박을 받던 소수 민족들도 반항의 조짐을 보였다.

 523년, 유연족의 아나괴가 회황진으로 쳐들어와 군대와 백성 2천여 명, 가축 10여 만 마리를 약탈했다. 이에 생활이 궁핍해진 회황진의 배성들은 군진의 장군 우경에게 구제를 요청했으나, 우경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분노한 백성들이 우경을 잡아 죽이는 폭동을 일으켰으며, 그여파는 다른 군진에게까지 삽시간에 퍼졌다. 두 달 후 옥야진에서 흉노족 파육한발릉이 봉기를 일으켜 군진의 장군을 살해했으며, 육진의 산호족, 진주와 남진주의 저족과 강족, 고평진의 칙륵인, 박골율진의 호인등이 반기를 들었다. 반란이 육진뿐만 아니라 북변 전체로 확대되자, 북위 조정은 대도독 이승과 부도독 최섬에게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그러나 북위 군대가 싸움에 패하고 도망치니, 북위 조정은 다시 원연을 파견해야만했다. 원연은 우근을 보내 칙륵인 반란군을 설득하는 한편, 유연족과 결탁하여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반란군이 북위 군대에 밀려 남하하는 도중 과육한발릉은 전사했고, 반란군 20만 명은 포로가 되었다. 북위 조정은 이 포로들을 하붇 지방의 정주, 기주, 영주 등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북위 조정은 이로써 반란을 잠재웠다고 여겼으나, 525년 기주에서 다시 발란이 일었다. 북위가 포로들을 강제 이주시켰던 세 곳은 원래 계급 갈등이 심했던 곳으로, 포로들이 유입되면서 그 갈등이 더욱 심화된 것이다. 육진 중 유현진의 병사였던 두락주와 회삭진의 병사였던 선우수례가 각각 봉기를 일으켜 화북 지역을 점령해 나갔으며, 선비족 갈영이 반란군을 무력 통합한 후 낙양을 위협했다. 이에 북위 조정은 원융, 원연 등에게 진압을 명했지만, 원융은 갈영의 군대에 죽임당했으며, 원연은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갈영의 봉기군은 산서성에 근거를 계호족 추장 이주영의 7천여 기마병에게 대패했으며, 갈영은 낙양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이렇게 육진의 난이 평정되자 북위 조정은 이것으로 평화와 안정을 기대했다. 그러나 북위 조정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왕조의 붕괴였다. 

 반란 진압의 계기로 군권을 손에 쥔 이주영은 황실의 내정까지 간섭했다. 당시 북위 황실에서는 장성한 효명제가 호태후의 섭정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에 효명제는 이주영 군권을 빌려 호태후에게서 정권을 되찾아오고자 했다. 하지만 호태후가 이를 먼저 눈치채고 친아들인 효명제를 독살해 버렸다. 효명제 독살 소식이 전해지자 이주영은 호태후를 숙청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낙양에 진입한 후 호태후와 관료 2천여 명을 살해했다. 후세는 이를 '하음의 변'이라 일컬으며, 이주영은 효장제를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효장제는 이주영의 곡두각시로 남아 있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에 효장제는 희비의 조산을 구실로 이주영을 궁궐로 불러들여 그르 주살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주영의 조카였던 분주자사 이주조가 이를 분하게 여겨 낙양으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오니, 효장제는 말도 없이 걸어서 도망치다 이주조에게 잡혀 살해당했다. 이후 이주조는 절민제를 황제로 내세웠다.

 531년 이주씨 일족이 북위의 정권을 장악했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 하고 일족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그사이 원래 이주영에게 소속되어있던 고환과 우문태가 각기 독립함으로써 북위는 고환의 관동 세력과 우문태의 관서 세력으로 분열됐다.

 532년, 고환은 이주씨 군대를 대파하고 낙양에 입성해 절민제를 죽이고 효문제의 손자를 내세워 효무제로 옹립했다. 그런데 고환의 전횡으로 효무제와 고환의 갈등이 심해지자 효무제는 고환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관중의 우문태에게 의탁했다. 이에 고환은 망설임 없이 수도를 낙양에서 업성으로 옮기며 11세의 효정제를 다시 황제로 내세웠다. 이리하여 북위는 관동과 관서의 각각 황제를 두게 되었다. 그런데 535년에 우문태가 효문제의 방탕한 생활을 빌미로 그를 독살하고 문제를 새 황제로 옹립하니, 이것으로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이로써 동위의 실권은 고환이, 서위의 실권은 우문태가 각각 쥐게 되었으며, 오래가지 않아 이들은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 고환 일족은 북제를 세웠고, 우문태 일족은 북주를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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