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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끝이 없다

  • 역사 속 인재 월나라 이재가(理財家) . 범여(范蠡) 범여는 초나라 사람이었지만 월나라의 대부의 자리에 있었다. 그는 와신 상담의 주인공 월나라 구천을 보좌하여 오나라에 복수하도록 하고 패업을 이루게 하였다. 그러나 범여는 구천이 어려움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을 같이 할 수 없고 결국에는 공신을 살육할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공직을 포기하고 상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재산을 수습하여 이름을 바꾸고 가족과 노비를 이끌고 배를 타고 떠났다. 그는 상업이 발달한 제나라에 도착하여 스스로를 '치이자피' 라고 칭하며 해변가를 경작하고 힘들게 노동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재산이 10만 금에 이르렀다. 제나라 사람들이 그 현명함을 알아보고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범여는 존귀한 명성을 오래 지니는 것은 상서롭지 .. 더보기
  • 중국 고대사 우이(牛李)의당쟁 우이당쟁은 우승유(牛僧孺)와 이종민(李宗閔)을 영수로 하는 우당과 이덕유(李德裕)를 영수로 하는 이당 사이에서 벌어진 정치 투쟁으로, 우승유와 이덕유의 부친 이길보의 개인적 원한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진사 시험에 응시한 우승유와 이종민의 답안에서 비롯된 싸움은 점차 과거출신 관료와 귀족 사이의 싸움으로 전개되었다. 당쟁은 사실상 헌종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정식적인 붕당은 목종(재위 820~824) 때 형성되었다. 이후 우이 당쟁은 무려 40여 년간 지속되었다. 808년, 헌종(재위 805~820)은 조정에 직언을 서슴지 않는 인재 선발을 목적으로 제책 시험을 실시했다. 이때 우승유와 이종민은 시험지에 조정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으며, 시험관들은 이들이 선발 조건에 적합하다고 생.. 더보기
  • 중국 고대사 육진(六鎭)의 난 499년, 북위 개혁의 구심점이었던 제7대 효문제가 병사하자 북위 신질서에 잠재되어 있던 사회적 모순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효문제의 뒤를 이은 제8대 황제 선무제(재위 499~515)는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정사를 외척에 맡겼으며, 제9대 황제 효명제(재위 510~528)는 나이가 어려 모후인 호태후가 섭정했다. 호태후는 효명제 등극에 공을 세워 시중, 거문하성, 영군장군이 된 우출 등 귀족파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자신의 섭정에 불만을 품고 연금을 시도했던 유등과 원차를 내보냈다. 호태후는 섭정 동안 북위의 경제를 성장시키긴 했으나, 그녀는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또한 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녀는 전국에 사찰을 건립하여 재정을 악화시켰다. 더불어 문벌귀족들은 서로 부를 경쟁.. 더보기
  • 중국 고대사 비수대전 (淝水大戰) "동진의 사마요를 장안에 데려와 상서좌복야로 삼고, 재상 사안은 이부상서, 장군 환충은 시중으로 삼겠다." 383년 7월, 전진의 부견이 동진 공격을 선언했을 때, 부견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고, 선비족 모용수와 강족인 요장이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전진 조정에는 동진 정벌을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았다. 한족 줄신 재상 왕맹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으니, 동진이 중원 아래 강남에 위치하고 있지만 정통 제위를 승계하고 있으며, 군신 관계가 정립되어 있으니 감히 정벌하지 말고, 우선으로 선비족과 강족을 정비할 것을 충언했다. 또한 부견이 가장 신임하던 동생 부융 역시 선비족, 갈족, 강족 등으로 후방이 어지러운 가운데 원정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 외에도 부견의 아들 중산공 선과 명승 도안이 반대했지.. 더보기

陶淵明

結廬在人境 /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 心遠地自偏
採菊東籬下 /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 飛鳥相與還
此間有眞意 / 欲辯已忘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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